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만약…’, 푸념 혹은 후회 / 임범

등록 2013-04-15 19:16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식민지에 이어 분단을 맞은 우리 역사에 대해, 사람들은 가정을 많이 한다. ‘만약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지 않았다면…’, ‘만약 김구 선생이 죽지 않았다면…’. 하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진행형이 아니라 완료형이 돼버린, 어쩔 수 없는 사안을 두고 푸념조로 하는 소리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도 그런 뜻일 거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그래도 사람인 한 가끔 푸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사에서 지나간 일을 가정하는 건 어떤가. 역사는 개인의 선택과 무관하기 쉽지만, 개인사는 다를 거다. 많든 적든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거고, 선택을 했을 거다. 그래서 ‘만약’은 후회나 미련으로 이어지곤 한다.

재일동포 영화감독 양영희씨 가족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두 편을 통해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제 때 제주에서 오사카로 건너갔는데, 해방 뒤 4·3 항쟁이 터져 돌아가지 못했다. 총련 간부로 일하면서 막내딸 양씨만 남겨놓고 세 아들을 북한으로 보냈다. ‘지상낙원’으로 알고 보냈는데 기대와 달랐고, 돌이킬 수 없는 이산가족이 돼버린 그 사연이 충분히 안쓰럽고 안타깝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얼마 전 읽은 양씨의 자전적 에세이 <가족의 나라>가 가슴을 쳤다. 그래서 며칠 전 양씨가 만든 같은 제목의 극영화도 봤다. 양씨의 셋째 오빠는 열네살인 1971년 북한에 갔다가 뇌종양에 걸려 18년 만인 99년 병 치료를 위해 3개월 체류 허가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양씨 부모가 북한에 큰돈을 써가며 수년간 힘쓴 끝에 이뤄진 건데, 석 달은커녕 보름 만에 북한으로부터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고 아무 치료도 못 받고 돌아가고 만다. 그사이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장면이 나온다.

셋째 오빠는 말수가 적고 힘들어도 힘든 표현을 안 하다가 여동생 양씨에겐 이런저런 말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밤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단다. “지시받은 사람을 만나서, 거기서 대화한 내용을 보고한다거나, 그런 일을 할 생각 있니?” 여동생은 거절했고, 속으로 오빠가 야속했고, 오빠는 미안하다고 했고, 여동생은 괜찮다고, 바로 잊어버릴 거라고 해놓고 이불 뒤집어쓰고 울면서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예감을 하고….

양씨 가족에게 ‘만약’은 금기어라고 했다. 만약 아들(오빠)들을 북한에 보내지 않았다면? 묻는 순간 바로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올 거다. 아들 가족들이 거기 살고 있는데 무너지면 안 된다, 그럴 여유가 없다, 그런 생각이었을 거다. ‘만약’은 역사든 개인사든 여유가 있을 때, 진행형 아닌 완료형일 때 하는 건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오빠가 떠난 뒤 여동생은 여행가방을 산다. 오빠가 사주려고 했던 가방이었다. 그때 가방가게에서 오빠가 말했다. “넌 이 가방 들고 세계를 맘껏 돌아다녀라.” 떠나기 전날 밤에 말했다. “난 생각을 멈추고 산다. 그래야 산다. 하지만 넌 생각하면서 살아.”

최근의 사태들은 참 답답하다. 전쟁이 나네 마네 하면서도 한두번 있었던 일이냐는 듯 다들 멀쩡히 지낸다. 갑자기 ‘이러다가 정말?’ 하며 불안해했다가, 바로 또 잊고, 그렇게 습관적으로 살면서 미국만 바라보고…. 이런 게 생각 없이 사는 것 아닌가 싶은데 또 생각을 하면 어쩔 건가 싶고…. 답답하니 실없는 짓인 줄 알면서 이따금 ‘만약’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가 싶었다. 내가 선택해서 역사가 이렇게 된 게 아닌데.

이 책과 영화를 보면서, 그게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이라는 말이 금기어가 될 만큼 여유가 없구나, 진행형이구나….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한겨레 인기기사>

박근혜 “대기업 보유 현금 10%만 투자해도…”
브라질 축구팬 2명 라이벌팀 응원단에 사살당해
싸이 ‘젠틀맨’ 5000만뷰 돌파…‘강남’보다 빨라
류현진 고교 은사 “류현진은 최고의 타자”
커피의 맛, 이 손 안에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1.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트럼프는 이겼지만 윤석열은 질 것이다 2.

트럼프는 이겼지만 윤석열은 질 것이다

나라야 어찌 되든, 윤석열의 헌재 ‘지연 전략’ [뉴스뷰리핑] 3.

나라야 어찌 되든, 윤석열의 헌재 ‘지연 전략’ [뉴스뷰리핑]

북한군 포로의 얼굴 [코즈모폴리턴] 4.

북한군 포로의 얼굴 [코즈모폴리턴]

우리가 ‘오징어 게임’을 보는 이유 [육상효의 점프컷] 5.

우리가 ‘오징어 게임’을 보는 이유 [육상효의 점프컷]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