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정신의학회(APA)가 펴내는 <정신질환 진단과 통계 편람>(DSM)은 현대인의 마음 병을 상담하고 진단하고 치료방법을 모색하는 데 길잡이 구실을 해왔다. 미국 학술단체에서 발행되지만 사용자는 전세계의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상담사 등등이니 영향력이 지대하다. ‘바이블’ ‘교과서’라는 별칭을 얻은 건 당연하다. 정체성, 성, 문화, 인격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며,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증후군, 장애, 질환인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길잡이들이 적혀 있다. 정신의학과 과학 지식이 줄 수 있는 당대 최선의 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진단편람은 지난 반세기 문화·정신사의 사료이기도 하다. 예컨대 성 정체성을 우리가 어떻게 정의하고 인식해 왔는지 변천을 엿볼 수 있다. 1952년 제1판에선 동성애가 성적 일탈, 인격장애였지만 2~4판을 거치며 동성애자라는 말은 진단에서 사라졌다. 이제 다음달에 제5판이 나온다. 제4판(1994) 이후 정식 개정으론 19년 만이다. 1999년 개정 논의를 시작한 이래 14년은 또 하나의 역사였다. 쟁점을 정리하고 각계 전문가 실무그룹을 짜고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 토론하고 논쟁하며 초안을 만들고, 그리고 이를 누리집(DSM5.org)에 공개해 네 차례의 의견수렴을 거쳐 지난해 말 최종안이 승인됐다.
5판 편람의 일부 내용을 보면, 아스퍼거 장애라는 진단명은 사라지며 자폐스펙트럼 장애라는 유연한 범주가 정식 채택된다. 행위중독이라는 진단명이 생기고 성 정체성 장애라는 용어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세세한 개정 사항은 다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달라진 시대와 문화, 신경과학과 유전학의 발전, 수명 연장 같은 변화가 반영된 새로운 진단편람이 5월 이후에 어떤 담론 문화로 이어질지도 궁금해진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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