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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계적으로 친절한 기자들을 알려주마

등록 2013-04-26 20:10수정 2013-04-26 21:50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저는 ‘친절한 기자’가 아닙니다. 까칠합니다. 단발 속보 기사를 중시하는 한국 언론의 풍토에 특히 까칠합니다. 그러니 친구가 없습니다. ‘친절한 기사’를 쓰고 싶은 욕심이 인간성을 망치는 것 같습니다.

친절한 기사는 진실의 전모를 풍부한 맥락 위에 명쾌하게 드러냅니다. 이를 탐사보도라고 합니다. ‘국제탐사언론인협회’(ICIJ)에는 탐사보도를 하려는 기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로 재산을 빼돌린 세계 각국의 정치인·기업인의 명단을 4월 초부터 연속 보도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 언론이 이를 인용보도했습니다. 해당 국가에선 관련자들을 수사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최근 세계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탈세 갑부’들을 지목하는 전문가가 많았습니다. 이들이 세금만 제대로 냈어도 정부재정의 파탄과 연이은 국제적 충격을 막을 수 있었다는 거죠. 그러나 ‘비밀주의’를 엄수하는 조세피난처의 정책 때문에 탈세 갑부의 정체는 장막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검은 자산을 환수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국제탐사언론인협회는 세계 금융위기의 주범을 고발한 셈입니다. 이번 보도에는 100여년에 걸친 탐사보도 역사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서구, 특히 미국의 근대 언론은 ‘감시견’(Watch dog)을 자처했습니다. 군림·부패하기 마련인 권력을 시민이 감시·고발해야 한다는 ‘폭로 저널리즘’이 여기서 비롯했습니다.

국제탐사언론인협회(www.icij.org)는 ‘지구적 권력’에 대한 감시견을 자처합니다. 폭로의 대상을 일국 정부에서 세계 차원으로 확산시켰습니다. 세계화의 물결이 절정에 이른 1997년 이 협회가 창립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곳은 그동안 다국적 기업·국제용병 조직 등에 대한 고발 기사를 써왔습니다.

폭로 저널리즘이 항상 유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초중반, 폭로에만 집착해 근거없는 보도를 남발하는 ‘옐로 저널리즘’이 생겼습니다. 이를 반성한다며 1940년대 ‘객관주의 저널리즘’이 등장했지만, 공신력 있는 취재원을 찾다가 권력자의 진술에만 의존하는 폐해를 낳았습니다.

1960년대의 탐사보도는 폭로 저널리즘의 ‘진정한 복권’을 외치는 기자들이 주도했습니다. 권력 감시의 본연으로 돌아가되 충분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권력을 ‘수사’ (Investigative)하자는 탐사보도의 개념이 이때 정립됐습니다.

이 협회가 실명을 콕 집어 보도한 주요 정치인 가운데는 러시아·필리핀·말레이시아 등의 전현직 대통령 및 총리가 있습니다. 협회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들이 벌인 세계적 범죄를 어느 나라의 수사기관보다 담대하고 정확하게 폭로했습니다.

60여개국 160여명의 기자들이 이 협회의 회원입니다. 평소 탐사보도에서 중요한 성취를 냈거나, 국제탐사포럼 등에서 교류한 기자들이 회원 자격을 갖습니다. 이번 보도는 그 가운데서도 40여개국 80여명의 기자들이 15개월 동안 협력 취재를 벌인 결과입니다. 소속 매체를 뛰어넘어 협력하는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혼이 이들에게 있습니다.

1976년 정치권과 마피아의 유착을 취재하던 <애리조나 리퍼블릭>의 돈 볼리스 기자가 살해당했습니다. 그해 만들어진 미국탐사보도협회(IRE)를 중심으로 20여개 언론사 40여명의 기자들이 6개월 동안 애리조나주의 부패구조를 추적해 보도했습니다. 이를 위해 휴직 또는 사표를 낸 기자도 있었습니다. 탐사기자는 소속사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 기자’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의 탐사기자들은 방대한 자료의 발굴·분석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했습니다. 컴퓨터 활용 보도(CAR)의 출발입니다. 끈질긴 추적만큼 자료분석의 노하우가 탐사보도에서 중요해졌습니다. 미국 퓰리처상에 ‘탐사보도 부문’이 제정된 것도 이 무렵(1985년)입니다.

국제탐사언론인협회도 이를 적용했습니다. 250만건의 자료 검토를 위해 데이터 검색프로그램인 ‘인터데이터’, ‘누익스’(NUIX) 등을 활용했습니다. 협회는 자료분석을 전담하는 기술지원 및 조사팀을 따로 두고 있습니다.

탐사보도는 친절한 기사를 쓰려는 기자들의 종교입니다. 한국에는 널리 전도되지 않았습니다. 협회가 홈페이지에 밝힌 회원 명단과 제휴 언론사를 보면, 한국 기자와 언론사가 없습니다. 한국인 조세피난자의 명단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데는 한국 언론의 낙후된 마인드가 있습니다.

“국경을 넘는 권력고발이 필요하지만, 각 언론사는 예산을 이유로 국제부를 축소하고 탐사팀을 해체하고 있다”고 협회는 지적했습니다. 저는 탐사보도팀을 거쳐 지금 국제부에 있습니다. 제가 까칠한 이유, 짐작이 가세요?

안수찬 국제부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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