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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북유럽 스타일 / 이유진

등록 2013-05-05 19:24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북유럽 따라하기’라고 해야 할까. ‘노르딕 스타일’이 연일 화제다. 유행은 가구부터 시작했다. 나뭇결을 살린 소박한 북유럽식 디자인이 국내에서 인기를 끈 지 벌써 10년이다. 잇따라 ‘스칸디나비아식’ 패브릭과 그릇들도 국내에 들어왔다.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카모메 식당>에 나온 그릇들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장난감이나 패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디자인이 파고들지 않은 곳이 없다. 요즘은 ‘스칸디 육아법’까지 대유행이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의 창의성을 높이고, 아버지들까지 양육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디자인 강국’으로 불리는 북유럽 나라들은 사실 ‘복지 강국’이다. 평등과 공공성이 그들 사회 복지의 기반이다. 19세기 산업화 이후 대량실업은 이민으로 이어졌고, 국내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페르 알빈 한손 스웨덴 총리는 1928년 “국가가 좋은 ‘국민의 집’이 되자”고 제안했다. 이 나라는 1937년 출산수당, 1947년 아동수당, 1950년 9년제 의무교육을 도입했다. 대공황 직후 기혼 여성의 공공기관 고용 금지와 여성 노동권 제약 입법안이 잇따르자 해당 위원회에 여성주의자를 다수 배치하고, 수적으로 남성 위원을 압도하도록 했다. 1980년대 이후 복지국가 위기론이 등장했지만 약자 지원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신필균 <복지국가 스웨덴>,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아빠 양육을 강조하는 ‘스칸디 육아법’이 탄생한 것도 필연이었다. 스웨덴에선 부부 합산 16개월 육아휴직 가운데 두 달은 반드시 다른 성이 써야 한다. 노르웨이도 50주가량 되는 육아휴직 중 일부를 아버지 몫으로 강제 할당했다. 덴마크는 남성 강제할당이 없지만 아이가 아플 때 부모 중 누구라도 연간 12주 유급휴가를 쓸 수 있다.

북유럽식 교육과 보건 정책의 핵심은 우정과 평등이다. 핀란드 학교에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교실 밖으로 내몰고 문을 잠근다. 강제로라도 같이 뛰어놀도록 하는 것이다.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따위의 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사교육도 우열반도 없다. 그렇지만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선 걸핏하면 세계 1등이다. 스웨덴은 ‘모든 아이는 우리의 아이’라는 신념 아래 이민자 자녀를 보호하고, 모국어도 가르친다. 보건 정책을 보면, 2011년 기준 스웨덴의 공공병원 병상 비율은 98%로 세계 1위인데도, 2%를 줄였다며 논란이 됐다. 노르웨이의 공공병원 병상 비율은 90%를 넘는다. 우리나라는 1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다.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에서 한국인의 노동시간은 연간 2193시간이었다. 덴마크·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모두 1700시간 미만이다. 중세 유럽 농노조차 1620시간 노동으로 우리보다 짧았다고 한다(이원재, <이상한 나라의 정치학>). 우리는 농노보다 더 많이 일하는 셈이다. 이쯤 되면, 온 가족이 인생 대부분을 집 밖에서 지내야 하는 우리 삶에 북유럽 가구를 들인대도 쓸 시간이나 있을까 싶다.

최근 만난 한 디자인 연구자는 “디자인은 생활의 반영”이라고 했다. 소박하고 여유로운 ‘북유럽 스타일’은 민주주의가 가진 평등의 가치를 삶에 철저히 적용해온 그들의 체제가 낳은 명품이다. 돈벌이를 위주로 하지 않는 병원, 경쟁 없이도 누구나 기본 생계를 유지하며 살게 하는 교육과 복지의 결합, 국가를 ‘국민의 편안한 집’으로 만드는 정책이 준 선물이다. 북유럽식 복지가 망했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공공서비스를 줄여온 이 땅에 북유럽 스타일 광풍이 부는 건, ‘저녁과 휴식이 있는 삶’을 원하는 한국인들이 내지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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