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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보훈처가 ‘신군부’ 밀영이라도 되나

등록 2013-05-08 19:25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올해도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물고 늘어진다. 지난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즈음해 “올해로 마지막”이라고 했던 그가, 올해도 이 노래의 퇴출을 공언한다. 그 집요함을 보면 박 처장은 광주 학살 위에서 정권을 찬탈했던 신군부를 지금도 떠받드는 것 아닌가 싶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항쟁 당시 시민들이 불렀던 노래가 아니다. 무수한 젊음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그해 12월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소설가 황석영씨가 개사하고, 김종렬씨가 곡을 얹어 탄생한 것이 이 노래였다. 앞서 간 이들의 뜻을 기억하고 살아남은 자의 계승 의지를 다짐하는 노래였다. 기억하고 다졌던 그 뜻이란 다름 아닌 국민 주권과 민주주의 수호였다. 권장할 노래지 배척할 노래가 아니다.

지난해 기념식의 한 장면은 지금도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황식 당시 총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순서에서 눈 감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박승춘 처장은 경망스럽게도 시종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국가적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부처의 장들의 참으로 어이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면 차라리 참석이나 하지 말 일이었다. 관직을 지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안달복달하는 그 모습이 차라리 불쌍했다.

5·18 항쟁은 다른 국가기념일과 성격이 다르다. 국가의 무력이 민주화 요구를 유혈진압한 데 대해 시민들이 일으킨 봉기였다. 한편에 국가 폭력이 있었다면 다른 한쪽엔 시민의 저항이 있었다. 5·18을 기억하고 정신을 되새기는 행사가 시민이 중심이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날만큼 정부와 군은 가해자 입장에서 참회하고 반성해야 한다. 다시는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없기를 다짐하면서 말이다.

노래 바꾸는 것에 그렇게 사생을 걸 필요가 있느냐고 따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기념식의 가장 중요한 상징적 의례는 이 노래의 제창이다. 의미와 다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훈처 멋대로 공식 기념가를 바꾸겠다는 것은, 국가가 다시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폭력에 맞섰던 항쟁을 국가가 나서서 박제화된 기념식으로 만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훈처를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인가. 보훈처는 그 설립취지와 달리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을 주도했던 군의 최고위 장성들이 은퇴 후 접수해온 곳이다. 박 처장 역시 사단장, 군단장, 국방부 정보본부장을 역임한 군 수뇌의 일원이었다. 그가 오매불망 5·18 항쟁을 기름 빼고 따귀 빼 맹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보훈처 산하 서울보훈청은 최근 5·18 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청소년 대상 글·그림·사진 공모전에서 일부 수상작의 교체를 사실상 강제하기도 했다. 이유인즉 시 부문 수상작에 총성, 피냄새 따위의 시어가 포함돼 있고, 그림 부문 수상작엔 군인이 시민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적 혹은 회화적 과장 표현도 아닌 사실 그 자체를 터부시하는 것이니, 그들의 속셈은 알 만하다. 지난해에도 서울보훈청은 초등생 수필 부문 수상작이 ‘전두환의 29만원’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고 펄펄 뛰었다. 박 처장이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퇴출시키겠다고 공언했을 즈음이었다. 박 처장을 지금 지휘하는 게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신군부 내란 수괴들일까? 그는 보훈처를 반란군의 밀영으로 만들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이들이 권력을 잡았다고, 삼일절이나 광복절 행사에서 일제의 만행을 기억에서 빼겠다고 하지는 못했다. 국가보훈처가 앞장서 군사반란과 민간인 학살, 정권찬탈의 기억을 5·18 항쟁에서 지우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외청장 한 사람이 감히 국가기념일을 박제화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을 얕잡아보기 때문인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했었다. 그런 그가 국가폭력의 기억을 애써 지우려 할 리 없다. 다만 그 밑에 찌질이가 많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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