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15년 전 한 정부 부처에 출입할 때의 일이다. 똑똑하고 술 잘 먹는 한 국장급 공무원과 몇차례 합석한 적이 있다. 만날 때마다 그의 단골 음식점에 갔다. 술자리는 즐겁고 유익한데 끝나고 나서가 문제였다. 신발을 신는 의자에 앉아 주인 겸 주방장을 불러 때리는 거였다. 앉은 자세로 주인에게 머리를 대라고 한 뒤 있는 힘껏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때마다 이리저리 휘날리던 주인의 몇 안 남은 머리카락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공무원은 욕설과 함께 뭐라고 말을 했는데 술에 취해서인지 때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때리는 사람이 너무도 당당하고, 맞는 사람도 당연한 듯 맞아서 말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폭력 행사는 일종의 의식처럼 매번 치러지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지금 와서 보면 그 국장급 공무원이 열 번도 더 날아갈 만한 중대사안이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음식점 주인도 고소를 하지 않았다. 상대가 실세 공무원이어서인지, 단골손님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터넷이 변변치 않던 때라 어디다 글을 올릴 생각도 못했을 거다. 나를 비롯해 주변의 모두가 인권 감수성이 현저하게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때에 견주면 지금은 이른바 ‘을’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많아진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을들은 그냥 하루하루 참고 지낸다. 이런 약점을 이용해 수많은 갑들은 여전히 대놓고 ‘갑질’을 한다.
갑들이 유념해야 할 역사의 법칙이 하나 있다. 자연상태의 먹이사슬은 공고하지만, 인간사회의 갑을관계는 종종 뒤집어진다는 사실이다. 소설과 영화로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밀레니엄> 시리즈에 이런 내용이 잘 묘사돼 있다. <밀레니엄>의 작가 스티그 라르손은 15살 때 윤간 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 당시 피해자를 도와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는 피해자의 이름을 주인공 삼아 이 소설을 썼다. 여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어릴 적 엄마에게 폭행을 일삼는 아빠의 얼굴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화상을 입힌 혐의로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출소 뒤에도 보호관찰관을 만나 정기적으로 보고를 해야 했는데, 변태 성욕자인 새 관찰관이 갑의 지위를 이용해 리스베트에게 몹쓸 짓을 강요한다. 리스베트는 관찰관이 자신을 성폭행하는 장면을 몰래 촬영한다. 이때부터 갑을관계가 바뀐다. 이른바 ‘라면 상무’도 만만한 스튜어디스를 상대로 갑질을 하다 대가를 치렀고, ‘욕설 우유’ 사건의 영업사원도 그랬다.
요컨대, 갑질은 을이 그것을 감내할 때까지만 유효하다. 을의 인내는 기존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한다. 을의 분노가 더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면 을은 체제 밖의 싸움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민란이나 혁명은 1% 갑의 횡포에 대한 99% 을의 저항이었다.
지금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윤창중 패러디 중 압권은 그가 비행기 안에서 남양유업 우유를 옆에 놓고 라면을 먹는 합성사진이다. 최근 공분을 산 갑질의 대미를 윤씨가 장식했다고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창중씨를 기어코 청와대 대변인에 앉혔다. 윤씨의 갑질의 배경에는 박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말이 없다. 사과를 해도 부족한 사람이 이남기 청와대 홍보수석으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월급쟁이 사장을 내세워 대신 사과하게 한 남양유업 회장보다 더 뻔뻔한 일이다. 기자에게도 갑으로 군림했던 윤씨가 모셨던 유일한 갑, 박 대통령은 사과를 받을 게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한다.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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