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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켄 로치와 위스키 / 임범

등록 2013-05-13 19:27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술친구인 형 한 명이 미국 대학에 강의를 맡아 2주에 한 번씩 미국을 다녀오면서 올 때마다 싱글몰트위스키를 사온다. 마셔본 것도 있고 처음 마셔보는 것도 있다. 싱글몰트위스키 브랜드가 전세계에 100개를 조금 넘으니, 잘하면 그 형 덕에 다 마셔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엔 그 형이 아는 사람 몇을 사무실로 불러 쟁여놓은 술들을 풀었다. 위스키 중에 처음 보는 것도 있었지만 나는 오랜만에 마셔보는 ‘라프로익’에 꽂혔다.

‘라프로익’은 스코틀랜드 아일러 섬에서 나오는 싱글몰트위스키다. 강화도보다 조금 작은 이 섬에 9개의 증류소가 있다. 이 섬 위스키들은 몰트를 건조할 때 이탄 연기를 쏘이고, 오크통을 해변에 쌓아놓고 숙성시켜, 스모키하면서 짭짤한 요오드 향이 난다. 어떤 이는 화장실 냄새(크레졸 냄새) 같다고도 한다. 라프로익은 이런 특유의 향이 가장 세다. 이 기이하고 낯선 향이 묘하게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자주 먹으면 물리는 듯도 한데, 이날 오랜만에 마셨더니 불안한 마음까지 달래준다. 이내 세상과 사람이 궁금해졌다.

영화에 술이 자주 나오지만 싱글몰트위스키가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위스키가 나오면 대다수가 버번위스키거나 블렌디드 위스키다. 외국에서 싱글몰트위스키 바람이 분 지 30~40년이 됐고, 최근 들어 한국에도 태풍처럼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 와인용 포도농장을 돌아다니는 영화 <사이드웨이>처럼, 위스키 증류소를 전전하며 각종 위스키를 마시는 영화가 나올 법하다는 생각을 했더니 마침내 나왔다. 뜻밖에도 감독이 켄 로치였다.

켄 로치(77)는 수십년 동안 좌파 영화감독의 아이콘이 돼온 이다. 스페인 내전, 니카라과 혁명, 아일랜드 내전을 배경으로 삼아 큰 서사를 엮기도 했지만, 주로 노동자나 하층민이 주인공인 작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번 영화 <앤젤스 셰어-천사를 위한 위스키>도 그렇다. 싸움질을 일삼던 전과자 청년이 애 아빠가 되면서 정신을 차려 위스키 증류소에 취직하게 되는 이야기다. 주인공과 같이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찌질한 청춘들의 코믹한 에피소드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저예산 일본 기획 영화 같은 외양에 켄 로치 스타일의 휴머니티가 살짝 녹아든다. 그 용매 구실을 하는 게 위스키다.

주인공의 사회봉사 활동 감독관인 중년 아저씨가 위스키 마니아다. 봉사 활동자들에게 증류소 견학을 시킨다. 위스키 시음회에도 데려간다. 후각 좋은 주인공이 위스키에서 뭔가를 발견한다. 물질적으로 보면 그건 생계를 해결할 방법이었지만, 모난 성정에 여유와 자신감을 준 건 위스키의 향이었을 거다. 영화가 차용한 위스키의 향기는, 오랜 세월의 숙성이 빚어낸 너그러움과 관용의 향기이다. 그 향기로 실업과 경쟁에 지친 영국 젊은이들을 위로하고 독려하려고 한다. 켄 로치는 2011년 영국의 미취업 젊은이가 100만명을 넘어선 게 이 영화를 만든 계기라고 했다.

물론 위스키는 젊음의 술은 아니다. 비싸고 친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폴 래버티도 “대다수 스코틀랜드 청년이 위스키를 맛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단다. 하지만 맛있게 삼킨 한 모금이 몰고 오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궁금함은 젊음의 열정과 맞닿아 있다. 위스키는 그렇게 젊음을 불러내기도 한다. <한겨레>가 25살이 됐단다. 위스키는 10년, 12년산을 많이 마신다. 15년, 18년산이면 고급이고 25년, 30년산이면 최상품이다. 숙성 연도가 길수록 향기가 깊고 풍성해진다. 목을 태우듯 찌르는 알코올의 독기가 줄고 대신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또 다른 맛으로 다가온다. 25년의 향과 맛으로 젊음의 열정을 부추기길!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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