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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성폭력의 진부함 / 이라영

등록 2013-05-15 19:24

이라영 집필노동자
이라영 집필노동자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잘 쓰지 않는 말이 있다. ‘인면수심’(人面獸心). 인간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가졌다는 이 표현은 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붙여진다. 특히 친족 성폭행을 다루는 기사에서 이 ‘인면수심’이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면수심의 가해자들에게 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양육’이라는 ‘인간적’ 이유로 허술한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마음은 어떠한가. 피해자 입장에서는 인간적인 판사의 판결이 짐승 같은 가해자의 마음보다 나을 게 없다.

인간이 저지르는 잔혹한 행위를 인간의 바깥 영역인 짐승에게, 곧 외집단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습관에 늘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념적 우월감을 경계한다. 인면수심이란 말도 본래는 ‘오랑캐’인 흉노족을 한족이 비하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듯이 인간에게는 외집단에 대한 멸시와 배척의 버릇이 있다. 익숙한 ‘정상’ 울타리를 벗어난 외국인·장애인·성소수자 등에 대한 편견도 이와 맞닿아 있다.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에 성추행을 저지른 윤창중 전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라고 했다.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없지만 성폭력을 행하는 사람을 평범한 인간과 분리시키기에 ‘그런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구별하려 애쓴다. 그러나 ‘술과 여자’가 지친 남성에게 제공되는 세트메뉴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희롱과 추행은 그저 ‘인간의’ 사업이고, 여가활동이고, 위안이다. 진부한 일상이다. 이 진부한 일상이 모여서 폭력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수심’을 길러낸다.

그는 ‘문화적 차이’를 운운하며 마치 한국에서는 되는데 미국에서는 안 되는 줄 몰랐다는 식의 변명도 한다. 수년 전 기자를 성추행한 국회의원은 “식당 여주인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이렇게 혹 떼려다 혹 붙이는 어리석은 변명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평소에도 ‘하던 짓’을 하다가 걸렸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 식당 여주인에게라면, 별문제 없는 일이 한국이 아니고, 식당 여주인이 아니라서 걸렸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성추행이라는 행위를 성찰하기보다 추행해도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을 구별하려는 지독한 버릇이 있다. 문화가 아닌 악습이다.

그리고 ‘한국’ 남자가 ‘미국 땅’에서 대통령의 방미 기간이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사고를 친 것이 ‘나라 망신’이어서 국민은 분노한다. 청와대는 국민과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국민과 나라에 중대한 과오를 범한 일로” 여겨져 대통령도 사과했다. 성폭력 사건을 두고 이토록 ‘국민의 이름으로’ 사과를 받아본 기억이 없어 황송할 지경이다. 국가의 이름을 더럽혀야만 성폭력은 심각성을 띤다. 이 사건이 “국격을 추행”했다고 사설을 쓰는 언론도 있다. ‘딸 같은’ 여성을 추행했다고 가해자를 비난하기도 한다. 가족주의와 국가주의 틀 안에서 성폭행을 읽을 뿐 여성 개인에 대한 인권의식은 없다. 그래서 ‘집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흉측한 가족 성폭행에 대해 판사들은 관용(?)을 베풀고, 나라 망신과 상관없는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성범죄는 툭하면 여자들이 처신을 잘못한 탓이 된다.

“애국심을 갖고” 살아가겠다는 윤씨의 기자회견 마무리를 보며 그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새삼스레 궁금해지기도 했다. 성추행 후에 조직적 은폐 속에 제 나라로 도망 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애국심 타령이 그리 엉뚱해 보이지는 않는다. 피해자와 신고를 도운 문화원 직원은 미국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지금 딱 제격이리라. “여성인 내게는 조국이 없다. 여성으로서 나는 조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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