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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을들의 분노’, 그 역설 / 한귀영

등록 2013-05-21 19:22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한국 사회 슈퍼갑들의 진상질이 연일 화제다. ‘라면 상무’에서부터 밀어내기의 대명사가 된 남양유업, 그리고 윤창중까지 갑의 횡포는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을들의 분노’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 분노는 우리 사회 울트라 슈퍼갑인 기득권층을 겨냥하고 있기에 불온하고 위험하다.

돌이켜보면 이명박 정부 때도 임기 초반 불온한 에너지가 스멀스멀 부상해 새 정부를 위협했다. 2008년 봄, 촛불집회 때가 그러했다. 신임 대통령이 통치 경험 부족으로 시행착오를 겪기 쉬울 때 도처에 잠복해 있던 저항 에너지들이 특정한 계기 속에서 거세게 분출했다.

그래서일까. 일각에서는 최근 을들의 분노가 거대한 대중의 분노로 결집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섞인’ 전망을 한다. 생존의 위기에 몰린 을들이 갑의 횡포에 맞서 연대함으로써 거대한 변화의 도화선이 되리라는 ‘기대’ 말이다. 2008년 촛불집회 정국이 광우병 위험 쇠고기라는 먹을거리 문제에서 파생되었다면 최근 을들의 분노는 생존 및 생계 위기에 처한 이들의 문제이기에 훨씬 절박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가 체감하는 문제이기에 인화성도 크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을들의 분노는 개별적으로만 존재할 뿐 응집되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이명박 정부가 초래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달리 현재의 갑을문제는 그 전적인 책임을 박근혜 정부에 돌리기 어렵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갑으로 존재한다. 갑을관계의 복잡한 체인 속에서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 이전에 존재론적 문제에 가깝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와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레토릭 차원에서 ‘을들을 위한 정당’임을 내세우는 민주당보다 박근혜 정부가 오히려 을들의 분노에 기민하고 유능하게 대처하고 있는 듯하다. 박 대통령은 시장의 횡포를 척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사정기관을 동원한 기업 옥죄기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박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 불안한 행보에서 회복해 지지도 50% 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최소한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만큼은 지지도로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비슷한 시기 신임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노무현 정부는 30% 선, 이명박 정부는 20% 선까지 하락한 것과 대비된다. 큰 과오 없이, 오히려 불온한 에너지를 자양분 삼아 통치 기반을 굳건히 다지고 있다.

을들의 분노가 결집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이유, 바로 분노의 에너지를 조직화하거나 하다못해 무임승차라도 할 수 있는 정치 주체들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민주당, 존재 이유를 상실한 진보정당, 그리고 빈집이 되어버린 시민정치세력들까지 어느 누구도 현재의 갑을 이슈에 대해 말이 아닌 실천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갑을 이슈가 아무리 중요한 쟁점이라 한들 ‘을’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을의 에너지가 분출되고 확산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을들의 분노’를 일정하게 수용하는 박근혜 정부의 통치는, 지배계급을 향한 대중의 저항적 에너지를 통치세력이 위로부터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동혁명’에 비견될 수 있다. 하지만 수동혁명 속에서 기존의 부조리한 구조는 건재하며 되풀이된다. 박근혜 정부에서 을들의 분노는 해소된 것이 아니라 잠시 봉합되었다가 다시 폭발할 뿐이다. 불온한 저항 에너지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가 긴 호흡으로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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