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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이른 여름날에

등록 2013-05-29 19:03수정 2013-05-29 22:26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안녕하세요…. 저는 7월 정도에 충남도민이 될 예정입니다.”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하승수 변호사가 이달 초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다. “제가 지향하는 가치를 생각하면 수도권을 떠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것이 맞는 것 같아 그동안 고민했습니다. 이제야….” 초년에 회계사, 변호사라는 출세의 지름길에 올라섰던 그가 중년의 나이에 일찌감치 그곳을 떠나려는 것이다.

소설가 박범신씨는 지난달 말 장편 <소금> 출판기념회를 핑계로 논산 집에서 잔치를 했다. 그는 이미 재작년 작가로서 글 농사를 고향에서 마무리하기 위해 귀향했던 터다. 지난해 산문집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에 이어 올해 등단 40년 만에 40번째 장편 <소금>을 세상에 선보였으니, 고향 땅의 선물은 풍성했다. 글 농사꾼으로서 그의 이력은 다시 개화기다.

언젠가 광화문역 새벽 전동차에 올랐을 때의 장면은 지금도 가슴에 섬뜩하다. 그 신새벽 좌석을 빼곡히 채운 장·노년들은 하나같이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눈을 감고, 무채색의 몸들을 전동차의 흔들림에 따라 열병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입영열차가 그렇게 암울했을까. 한낮의 탑골공원도 그랬다. 3500원짜리 이발소, 2000원짜리 콩나물국밥집, 천원짜리 막걸리, 가끔씩 다람쥐들의 주름진 유혹.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졸거나, 배회하거나, 급식을 기다린다. 빈 막걸리통을 끼고 잠드는 이들이 하나둘 늘 때쯤이면 지린내 진동하는 골목길. 새벽 전동차 인생의 목적지가 거기였나?

코언 형제의 영화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빌리지 않아도, 노인을 위한 도시는 없다. 처절한 경쟁과 숨가쁜 변화를 배겨낼 수 없다. 도시에서 탈락자는 시장의 물 간 생선. 선거철에나 사기성 짙은 이들에게 겨우 사람 대접 받는다. 해병전우회의 결속력에 맞먹는 어버이연합으로 뭉쳐 분노를 마음껏 불사른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깊어지는 남루. 도시의 문제는 노인의 문제, 그러나 도시는 그들의 양적 팽창을 감당할 수 없다. 해결할 의지도 없다. 노년의 문제는 실업, 빈곤, 질병, 상실감, 분노만이 아니다. 그 바탕에는 소비만 하는 존재로서의 비루함이 깔려 있다. 그것은 생산하고 나누는 존재로 설 때만 이겨낼 수 있는 것. 생산의 숙련·비숙련, 생산량의 많고 적음을 걱정할 건 없다.

김수영 시인은 1956년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로 시작하는 ‘여름 아침’을 썼다. 대로에서 10분 이상, 100미터 이내엔 민가 한 채 없는 서강의 궁벽한 동네였다. 밭 500여평을 일궈 채소를 가꾸던 아내가 농사꾼 닮아가는 모습을 보며 느낀 감동을 시는 담았다. “…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숙련 없는 영혼의 생명을 키우는 노동이 얼마나 숙연했으면, 시인은 하늘도 그 모습 영원히 기억에 담으리라 장담했을까.

언젠가부터 이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아이(1세)는 흙에서 자라, 때가 되면 도회지로 올라가 공부하고 일자리 찾고, 결혼해 자식(2세)도 낳고, 자식이 장성해 결혼할 때쯤이면 도시를 털고 제가 자란 땅으로 돌아온다. 양식을 길러 함께 나누고, 자식의 자식(3세)을 받아 저처럼 흙에서 자라게 한다. 그 아이가 커서 도회지로 가고 장성해 결혼할 때쯤 그 아비(2세)도 제가 자란 곳으로 돌아오고, 그러면 저는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풀, 나무, 곡식이 되어 아이들 몸으로 되살아는 꿈을 꾼다. 순환하는 물처럼.

세월의 풍상이 깊게 하는 건 생명에의 사랑, 키우는 건 생명에의 정성. 생명을 기르는 데 그만한 것이 또 있을까. 유년의 생명에게 돌아가, 유유상종 함께 일하고 함께 어울리며, 동병상련 서로 돌보고 위로하고, 세세연년 그런 삶 돌게 한다면, 노년이라고 도대체 비루할 겨를이 어디 있을까.

곽병찬 논설위원,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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