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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채털리의 덫 / 민규동

등록 2013-05-29 19:04수정 2013-05-30 11:34

민규동 영화감독
민규동 영화감독
1960년 런던 한 재판정에서 야유와 박수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피고는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시작되는 로런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었다. 피고 쪽은 육체와 인생에 대한 참다운 성찰이 배어 있는 수작이라 호소했고, 원고 쪽은 수치심을 극도로 자극하는 타락한 외설의 맹독성이 여전히 반사회적인 위험요소라 쏘아댔다. 작가의 사후 30년이 지나 벌어진 ‘채털리 사건’ 재판은 결국 무삭제판 판금 해제로 판결나면서, 19세기의 법이 20세기의 내면을 구속할 수 없음을 증언했다.

일전에 그 소설 원작의 영화 상영이 있었는데, 내심 상영 직후 관객들의 표정이 얼마나 달뜰까 궁금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얼굴엔 홍조 대신 얕은 수위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45년 전 한 여가수의 미니스커트에 전국이 들썩였지만, 지금은 교복 치마가 그보다 더 짧아진 시절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이토록 금세 식을 줄 알았다면 표현의 자유라는 그 거대한 논쟁은 애초에 시작되지도 않았을 테지만, 현실은 한치 앞을 못 보는 당대의 윤리적 잣대와 끝없이 전쟁을 반복하고 있다.

영화 <박쥐>의 원작 <테레즈 라캥>도 너무 큰 비난에 에밀 졸라가 서문에 해명까지 달아야 했다. 성도착의 화신으로 오해된 사드의 <소돔 120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조이스의 <율리시스>, 밀러의 <북회귀선> 등 수많은 고전이 판금됐다. 영화 <감각의 제국>은 정작 일본에선 개봉도 못했고, 여배우는 비난을 못 견뎌 은퇴해버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음란 시비 끝에 결국 감독이 투옥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한상영가 판정을 뒤집은 독립영화 <자가당착>의 예처럼, 시간이 주는 각성의 힘은 대부분의 억압이 그른 판단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한데 요즘, 이 명백한 흐름에 혼돈이 추가됐다. 막말의 표현력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일베라는 새 현상이 터지자, 법정에서 주로 피고 쪽이었던 자들이 원고 쪽으로 자리를 옮겨 소프트코어는 합법이지만 하드코어는 불법이라며 단죄에 나서는 풍경 때문이다. 그들 발목엔 ‘난 당신 말에 찬성하진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볼테르가 말했다고 잘못 알려진 톨레랑스에 대한 유명 구절이 엉거주춤 매달려 있다. 곧, 광속으로 진화중인 소프트와 하드의 모호한 경계를 내세워, 그 못난 행동들을 표현의 자유와 연동시킨 순간 각주구검의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이다.

신을 창조해내기 전에 인간의 삶이 있었듯, 실은 자유를 규정짓기 전에 이미 표현이 있었다. 더 평등한 인간적 삶을 꿈꾸지 못하도록 신이라는 계급을 발명해냈듯, 특권층의 세계관에 반하는 나쁜 망동망언을 제외하기 위해 자유라는 개념이 고안된 것이다. 곧, 법으로 표현을 제한해 명예를 지킨다는 논리는 일면 상식적이지만 그 입법 주체가 체제 수호에 앞장서는 위정자와 다수당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곧, 내 신념엔 자유, 반대 신념엔 구속이라는 그 무서운 무관용의 논리가 재활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신이 담긴 관을 택배라고 모독하는 행위를 어찌 볼 것인가.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이미 건국 이후 우리 정치가 보여준 긴 오욕의 역사가 그보다 더 큰 모독이 아니었나.

황망한 막장 배설처를 폐쇄한다고 해서 분명 그 열패감에서 피어난 익명의 광기가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대신 이토록 황송한 관심에 어느 때보다 흥분한 그 사이트의 신도들은 순교자의 영혼으로 이렇게 외칠 것이다. 채털리의 원본을 태워버린다고 섹스의 고귀함을 예찬하고픈 인간의 성정이 덮이지 않았듯, 우리도 끝내 부활할 것이다.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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