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 문화부 기자
얼마 전 <한겨레> 창간 25돌을 맞아 여성계 원로인 이효재 전 이화여대 교수에게 ‘어른’으로서 한 말씀 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넣었다. 그는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이 언론에 자꾸 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진해에 살고 있는 이 전 교수는 지역공동체 운동을 하다가 최근 제주 이주를 준비중이다. ‘세상’과 거리가 먼 시골에서 조용히 생을 정리하려는 것으로 짐작된다.
평소 말을 아꼈지만, 지난해 4월 한국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가 주는 ‘한국여성지도자상’을 받으며 그는 이례적으로 수상 소감을 전달했다. 인구 과잉 탓에 지구 전체 생태계 위험이 염려되는 만큼,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 아이를 낳기보다 분쟁지역 고아들을 데려와 국내에 입양하는 것도 고려할 만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한 나라에 머물지 말고 “지구를 한 마을로 생각하며 크게 꿈꾸라”는 얘기였다.
지난 4월 팔순을 맞은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목사는 기념행사를 열어준 후배들에게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한 자, 슬픔에 빠진 자들과 함께했다”며 “내 논리는 예수님처럼 살자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평생 여성 농민과 노동자들을 ‘어린 예수’로 받들고 섬겼다. 가난하고 서글픈 사람들을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며 인류의 앞길을 탐구하는 공동체 순례를 계획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세상을 떠난 박영숙 재단법인 살림이 이사장 역시 존경받는 원로였다. 무엇보다 그는 ‘일상 정치’에서 온몸으로 ‘어른의 품격’을 보여줬다. 어린 사람한테 함부로 말을 낮추는 법이 없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며, 옷을 사지 않고도 단정함을 유지했다. 여러 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을 지원했고, 평화와 돌봄을 중시했다. 젊은 후배들 상당수가 이런 ‘돌봄과 살림’은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가부장제의 음모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이런 일에 여성이 앞장서야 한다고 믿었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2월, <한겨레>와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진보진영의 남성 중심성을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박 이사장은 “진보 세력이 성인지적이지도, 혁신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아니하고 개인 욕심들을 갖고 있다. 그런 부분을 보면서 (그동안의 활동이) 다 도루묵이 되는 것 같은 억울함을 느낀다”고 했다. 정치권이 사익을 내려놓고 ‘촛불 시민’ 같은 정치적 주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지만, 귀담아듣는 이는 적었다.
그해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고 나섰다. 이 전 교수, 조 목사, 박 이사장을 비롯한 여성 원로들이 “새누리당과 박 후보는 ‘여성 대통령’을 말할 자격이 없다”며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야당이 버린 가치를 역이용한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었다. 민주당 안팎에선 박 이사장의 개탄처럼 ‘개인 욕심’에 몰두했던 당내 인사들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지만, 누워서 침 뱉기였다.
박 이사장의 빈소에는 그가 생전 안타깝게 생각했던 이른바 진보진영 인사들이 두루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뒤늦은 후회가 물결처럼 넘실대는 가운데 그의 생전 육성이 전달됐다. “참 행복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그렇게 쉽게 쓰지 못하는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이렇게 관대하고 강인했던 어른들이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그들은 자신의 남은 시간을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후배들에겐 한결같이 개인 잇속에 머물지 않고 지구촌 생태계의 한 조각으로 성찰하며 살아가길 충고한다. ‘진정한 어른들’이 점점 세상과 거리를 두는 지금, 그들의 당부가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대구 여대생 살해 사건 초동 수사, 경찰 제대로 ‘헛발질’
■ ‘장기이식 천국’ 중국, 그 많은 심장은 어디서 오나
■ 최진실이 유명해질수록 그의 복수심은 커졌다
■ 항우울제 ‘프로작’은 인간을 구원했는가
■ [화보] 올 여름 유행할 수영복은?
■ 대구 여대생 살해 사건 초동 수사, 경찰 제대로 ‘헛발질’
■ ‘장기이식 천국’ 중국, 그 많은 심장은 어디서 오나
■ 최진실이 유명해질수록 그의 복수심은 커졌다
■ 항우울제 ‘프로작’은 인간을 구원했는가
■ [화보] 올 여름 유행할 수영복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