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용 사회2부 기자
인간은 군집동물이다. 군집동물인 개미에게서 의사소통 도구인 페로몬을 제거하면 개미 군집은 분열되고 개체는 사멸한다. 인간의 언어도 그렇다. 언어는 그만큼 쓰기 편하고 자유롭게 소통돼야 한다. 하지만 우리 일상엔 소통을 막는 언어들이 즐비하다.
얼마 전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지인과 한 대학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반납하려는데 지인이 ‘퇴식구’란 명패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식당을 나와 물었더니 “잠시 헛갈렸다”고 했다. ‘식기 반납’이라 쓰거나 그림으로 표기했다면 어땠을까. 이해가 더 쉽지 않았을까.
지하철역에 비치된 심장박동기엔 ‘심장자동제세동기’란 긴 이름이 붙어 있다. 세동은 우리말로 ‘잔떨림’을 이른다. ‘없애다’는 의미의 ‘제’가 붙어 ‘잔떨림을 없애는 기계’가 됐다. 일정치 않은 잔떨림이 있을 때 이를 없애 심장박동을 또렷하게 하는 것이다. 증상과 기계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하는 의료인들의 전문 용어를, 평범한 사람들의 쓰임에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위급상황에서 이런 복잡하고 발음하기 어려운 말이 마땅할까.
박근혜 대통령이 근절하겠다며 공약했던 ‘4대악’ 중엔 불량식품이 있다. 유해식품을 없애겠다는 의도였는데, 엉뚱하게 정부가 전국의 초등학교 앞 구멍가게를 소탕하겠다고 나선 것 아니냐는 조롱거리가 됐다. 박근혜 정부 핵심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의 ‘창조과학’도 그런 오해를 불렀다. 창조과학은 진화론에 반하는, 창조론을 위한 해석이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성경> 주장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려고 주요 교회들이 후원해 만든 단체다. 국가 기초과학을 끌어가야 할 부처 이름에 가장 비과학적인 이름이 붙은 셈이다.
잘못 쓰인 말이 있다면 힘써 바로잡아야 한다. 기자가 취재하는 서울시는 지난해 인격 비하적 용어라며 ‘잡상인’을 ‘이동상인’으로 바꿨다. ‘고령자’나 ‘노인’ 대신 ‘어르신’으로 쓴다. 여름철 넥타이를 매지 않는 가벼운 정장 차림을 일컫는 ‘쿨비즈’를 ‘시원차림’으로 쓰자고 한다. 지하철 승강장에 설치된 스크린도어도 ‘승강장 안전문’으로 의미를 뚜렷하게 했다.
여전히 관성으로 써오던 말을 쓰기도 한다. 지난 3월 발표한 일자리창출대책에서 서울시는 혁신적인 사회적 기업을 ‘히어로(HERO) 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굳이 이렇게 불러야 할까. 종합계획을 ‘마스터플랜’이라 하고, 노숙인이나 노인을 위한 의사를 ‘스트리트 닥터’로 부르는 대목은 실소케 했다. 정작 이 혜택을 받을 이들이 이 말을 알아들을까.
지난 5월15일 스승의 날은 세종대왕의 생일이다. 중국이 공자의 생일(9월10일)을 스승의 날로 삼듯, 우리 민족이 존경할 스승으로 한글을 만든 세종을 꼽은 것이다. 올해는 한글날(10월9일)이 22년 만에 다시 국가 공휴일이 되는 해다.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된 것은 국민들이 한글의 제정 의미와 가치를 되새길 기회가 적었다는 반성에서 비롯됐다.
얼마 전 말귀가 어두운 한 할머니가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담원과 대화를 나눈 녹음파일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이 할머니는 전화를 걸어놓고도 ‘○○ 유 플러스’라는 상대의 답을 알아듣지 못해 ‘거기가 어디냐, 불난 거냐’고 거푸 되물었다. 플러스를 ‘불났어’로 들은 것이다. 한바탕 웃고 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할머니가 불쌍하네. 평소 젊은 사람들과 소통이 안 돼서 얼마나 답답할까?” 단지 우리말을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언어가 우리 사회의 차별과 배제를 낳는 기제가 되면 안 되겠기 때문이다.
박기용 사회2부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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