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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리가 ‘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

등록 2013-06-11 19:23수정 2013-06-18 13:17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우리 사회에 한 가지 아쉬운 특징이 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 다 같이 의분을 매우 잘한다. 일정 기간 동안, 해당 사건이 밝혀준 부조리를 바꾸어야 한다고, 거의 모두 다 같이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흥분이 가라앉는 대로 사건은 잊히고 새로운 공분 대상을 찾는다. 그러고는 언론매체의 소질상 사건화될 수 없는 그 무수한 사회적 폭력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개인적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들이다. 이북 주민들에게 ‘수령의 전사’ 되는 것이 강요된다면, 우리에게는 ‘생존 전사’ 되는 것이 강요된다. 부적응자들을 철저하게 걸러내는 사회에 어떻게든 제대로 편입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한 가지 사례를 들겠다. 2년 전에 영화감독 최고은은 ‘아사’라고 할 수 있는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갑상선기능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던 그가 수일째 굶은 상태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을 돈도 힘도 없어 사망했다. 실은 “선진국이 됐다”는 대한민국에서는 돈이 없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아사한다. 그러나 학력이나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는 쪽방의 독거노인의 아사는 고작해야 지방신문에서 단신으로 처리될 일이지만, 이미 영화를 만들어본 젊은 고학력자의 죽음은 ‘신분’에 미친 사회에서 그 ‘격’을 달리했다. 매체들이 일제히 보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때마침 사회적 타살이라고 할 그 죽음이 영화계의 가난한 다수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었다고, 영화인 노조가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제작사라는 이름의 ‘갑’들이 휘어잡고 있는 영화계에서는 영화 스태프의 월평균 소득이 불과 52만원(2009년 현재)이었다. “한류 영화들이 아시아를 점령한다”고 보수주의자들이 쾌재를 부르지만, 1960년대 말에 구미시장을 공략한 한국제 의류를 저임금으로 겨우 먹고살았던 여공들이 만들었듯이, 한류 영화도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착취의 산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다.

생존공포에 빠져 그저 경쟁에서 살아남아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만을 꿈꾸는 사람은 사회적 부조리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율적 개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주류’가 간절히 열망하는 사항이다.

좌우간, 몇 달 동안 최고은 감독의 죽음은 논쟁거리였고, 그 영향으로 예술인복지법이 만들어져 최근 시행됐다. 한데 그 법에서 4대 보험 혜택이 빠져 한계가 많은데다가 영화계 ‘을’들에 대한 ‘갑’의 횡포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독거노인들이 계속해서 지병과 배고픔으로 죽어나가는데, 그중에서 아사자가 몇 명이 되는지 정확한 통계마저도 없다. 2011년에 무연고 사망자가 727명에 달했는데, 그중의 상당 부분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경쟁에 중독된 사회는 경쟁능력이 없는 ‘주변인’에 대해서는 원초적으로 무관심하고, 한때 세인들의 눈길을 끈 최고은 사건은 이제 기억에서 사라져간다. 그리고 전혀 바뀌지 않은 현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최고은은 비록 배고픔으로 죽었지만, 한국 사회의 신분논리상 ‘지식인’으로 분류됐다. ‘지식인’의 죽음은 그나마 잠깐이라도 뉴스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의 공론장을 ‘관리’하는 고학력자들은 그래도 ‘동류’의 생사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공돌이, 공순이’의 죽음은 요즘 아예 ‘뉴스’로 다루어지지도 않는다. 43년 전에 진짜 지식인 함석헌이나 안병무에게는 전태일의 죽음은 그들의 지적인 인생을 바꿀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병영형 독재국가에서 살아야 했던 인텔리들에게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집안 형편상 죽어도 인텔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도 있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적 세계로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라서 그런지, 이제는 그런 부채의식마저도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삼성 노동자 중에서는 이미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이 56명에 이르고, 적어도 1명(14년 동안 방독마스크나 보호구 없이 위험물질을 다루었다가 2011년에 사망한 김진기씨)의 경우에는 산재사망이라는 공식 판정까지도 나와 있지만, 이는 대다수 언론에서 ‘뉴스’도 되지 못하고 ‘주류’ 사회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최근 서울대 학생들이 “기업 살인”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리라고 판단되는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의 초빙교수 임용에 반대해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과연 지금도 버젓이 자행되고 잘 사건화되지 않는 기업의 탐욕에 의한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삼성전자의 제품들이 얼마나 많은 ‘을’들의 고통·질병·사망을 대가로 해서 만들어지는지를 뻔히 알면서, 우리가 수십명의 노동자들을 죽인 이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라도 제대로 해봤는가? 계속 죽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개인 책임을 과연 느낄 수 있는가?

일본의 패전 이후에 나중에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사상의 왕’으로 통하게 된 비평가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시 천황제 파시즘 시기의 일본을 “무책임의 체계”라고 규정했다. 모든 사람이 다 대가부장인 천황에게 충성만 해야 하는, 주체성이 거의 결여된, 개인이 아닌 ‘구성원’인 만큼, 아무리 끔찍한 악행을 저질러도 주체적이지 못한 ‘시스템의 나사’들은 이 악행을 ‘개인으로서의 나’의 책임이라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서구 중심주의적인, 자유주의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분석이 전전 일본의 중요한 측면을 폭로했음에 틀림없다. ‘가족국가’ 틀 안에서는 자율적 개인이 불가능한 이상, 책임 있는 개인도 당연히 없다. 한데 ‘가족국가’와 이미 사이 멀어진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과연 얼마나 다른가 싶다. 이유는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자율적 개인도, 책임의식이 있는 개인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들이다. 이북 주민들에게 ‘수령의 전사’ 되는 것이 강요된다면, 우리에게는 ‘생존 전사’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강요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부적응자들을 철저하게 걸러내는 사회에 어떻게든 제대로 편입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 싸움에서는 전우라고는 없다. 혹시 메가스터디라는 학원 재벌의 이 광고 문구를 기억하는가: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실은 이 단순해 보이는 텍스트는 박정희 시절의 “국민 총동원”, “군대에 갔다 와야 남자가 된다”, “하면 된다”, “잘살아보세”만큼이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시’를 그대로 잘 표현한다. 사회의 규율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추어서 자신의 몸값을 무조건 높여야만 하는 우리의 ‘생존 전사’들에게는 ‘우정’ 같은 개념은 허용되면 안 된다. 대타적인 ‘정’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생존 전사’의 정신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낙오의 공포다. 혹시나 누군가가 성공하고 내가 밀리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다.

사회가 유발한 생존 공포에 빠진 이들에게는 어떤 대타적인 책임을 느낄 만한 여지가 전시의 일본 군인만큼이나 없다. 오늘은 이용가치 높은 그 누군가에게 아부 못하고, 내일 공부를 망치고 모레 스펙 쌓을 일을 못하게 되면 ‘나’부터 망하는데, 백혈병에 걸려 죽는 삼성 노동자나 독거노인, 제작사들이 함부로 부리는 영화판 스태프들을 생각할 여유라도 있겠는가? 실은 생존 공포라는 부자연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된 사람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져라”고 요구한다는 것 자체는 어쩌면 지나치게 가혹할는지도 모른다. 생존공포증은 엄연히 ‘병리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유발된 병리적 상황이다. 생존공포에 빠져 그저 경쟁에서 살아남아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만을 꿈꾸는 사람은 사회적 부조리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율적 개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주류’가 간절히 열망하는 사항이다. 자율적 개인이라면 약간이라도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서 위험물질을 다루는 반도체 노동자들에게 보호구조차 제대로 지급해주지 않는 자본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을 터인데 말이다.

우리 사회는 공통의 책임의식을 공유하는 자율적인 개인들 사이의 연대만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연대까지의 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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