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사람이 살면서 경찰서·법원 문턱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내가 어릴 때 어른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이 말은 단순히 법원과 경찰서 출입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성가신 분쟁이나 송사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나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소송을 4번 겪었다. 내가 소송을 낸 적은 없고, 내가 쓴 기사에 등장한 사람들이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다. 나는 명예훼손 관련 재판을 치를 때마다 어른들이 왜 “사람이 살면서 경찰서·법원 문턱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지 절감했다. 피고로 법정에 나갈 때는 왠지 주눅이 들고 위축됐다. 법률 지식도 부족했다. 나는 첫번째 명예훼손 재판 때는 보도 내용이 사실이면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명예를 훼손하면 문제가 됐다.
막막한 어둠 같았던 명예훼손 재판에서 내가 빠져나갈 비상구는 위법성 조각 사유였다. 언론 보도가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했더라도 언론 보도가 공익을 위한 것(공익성)이고, 보도 내용이 진실(진실성)이거나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상당성)가 있으면 법원은 기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보도의 공익성을 입증하긴 쉬웠다. 하지만 기사 내용이 진실임을 증명하긴 어려웠다. 취재할 때 상대방이 만나주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고 꼭 확인해야 할 자료를 감추고 내놓지 않으면 100% 정확한 기사를 쓰긴 어려웠다. 재판 과정에서 상대방은 기사의 꼬투리를 잡아 “기사 내용이 허위”라고 공격하곤 했다.
결국 명예훼손 재판에서 가장 큰 쟁점은 기자가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상당성)의 존재 여부였다. 상당성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 나는 취재 과정에서 충분한 진실 확인 절차를 거쳤음을 증명해야 했다. 취재원의 신뢰도를 나름대로 꼼꼼하게 검증했다는 것을 밝히고, 녹음한 취재원과의 대화 내용을 푼 녹취록 등을 재판부에 냈다. 당사자의 반론과 해명을 받기 위해 언제 어디로 몇 번을 찾아갔고 전화했고 “연락을 달라”는 메모를 남겼지만 회신이 없었다는 점도 밝혔다.
‘5·18 때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방송해 물의를 일으킨 종합편성채널 <채널에이> 관계자가 지난 5일 방송통신심의위 심의에서 한 심의위원이 “(북한군이) 5·18 때 광주에 왔다는데 무슨 근거가 있냐”고 묻자 “오지 않았다는 근거는 있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런 황당한 반응은 이 보도가 위법성 조각 사유에 기대기가 쉽지 않다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5·18 북한군 개입’ 보도는 공익을 위한 것이란 첫 대목에서 난관에 부닥친다. 5·18 민주화운동은 국회 청문회, 검찰 수사, 법원 판결,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등의 활동으로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고 대법원에서 사법적 판단도 마무리됐다. 채널에이의 보도로 예상할 수 있는 공익이 뭔지 모호하다. 반면 시청률 끌어올리기란 종편의 ‘사익’은 뚜렷해 보인다. 게다가 보도 내용을 보면 탈북자의 증언을 그대로 인용 보도했을 뿐 진실 확인 노력도 부족해 보인다.
“(북한군이) 5·18 때 광주에 왔다는데 무슨 근거가 있냐”고 묻자 “오지 않았다는 근거는 있느냐”는 채널에이 쪽의 반문은 보도의 공익성, 진실성, 상당성을 보도한 쪽이 증명해야 한다는 전제를 허무는 역공이다. 이른바 ‘반사신공’의 채널에이식 변형이다. ‘반사’는 초등학생들이 말싸움을 할 때 쓰는 단어다. 상대방의 욕설이나 말을 그대로 되받아 다시 돌려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반사는 초등학생 전용 용어라 중학생이 되면 ‘유치하다’며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채널에이 수준을 알 만하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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