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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그녀의 거짓말 / 민규동

등록 2013-06-26 19:12

민규동 영화감독
민규동 영화감독
25년여 전, 한 어여쁜 신입생 후배가 내게 물었다. “저런 데서 자라나는 아이는 얼마나 불행할까요?” 난 의뭉스럽게 대답했다. “여기서보단 괜찮을 거 같은데… 최소한 엄마 허리는 덜 휘겠지.” 우리는 그때 북한의 국영 탁아소를 보도하는 사진들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엄마를 노동 현장으로 몰아내며, 동시에 어려서부터 엄마로부터 분리시켜 사적 육아를 방해하는 국가 시스템의 혹독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몇 년 후, 비흡연자인 그녀는 다시 내게 물었다. “나중에 임신 못하고 그러면 어떡하려고….” 난 곱게 대답했다. “만약 임신이 안 되면 담배 탓일까? 최루탄 탓일까?” 바로 앞엔 줄담배로 단련이 되어서인지 최루탄 가스 한가운데에서도 잘도 버티던 한 여자 선배가, 마치 난산을 겪는 것처럼, 흡연 중 뱉은 긴 가래침이 잘 끊어지지 않아 짧은 혀를 내두르며 켁켁거리고 있었다.

몇 년 뒤, 싱글로 살겠다고 선언한 그녀가 다시 내게 물었다. “결혼에 목매는 동창 친구들을 보면 바보 같지 않아요?” 난 서둘러 대답했다. “난 기회 되는 대로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하고 가능하면 다처를 꾸미고 더 가능하면 다부의 일원으로 살고 싶어.” 빈번히 챙겨야 했던 부조금을 어떻게 환수할까 고민하느라 발걸음이 아주 무거웠던 어느 결혼식장에서 만남이었다.

몇 년 뒤, 페미니스트로 불리길 원하는 그녀가 내게 물었다. “한국에 이제야 여성영화제가 생긴 거 알아?” 난 무심코 대답했다. “여성영화제라는 게 만든 이가 화성인이든 미생물이든, 여성의 삶을 가치 있게 다룬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인 줄 알았어. 알고 보니 여자 감독이 만든 영화만 상영하더라. 그럼, 아동영화제는 애들이 만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통이 날아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남자들끼리 해 처먹었으면 됐지. 여자들끼리 오랜만에 좀 해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쁘냐? 어딜 끼려고 그래? 하여튼 남자란 새끼들은 우릴 가만두질 못해!” 말대꾸를 한마디만 해도 내 얼굴에 담배를 지질 태세로 침과 욕설과 눈물과 분노를 연신 퍼부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친구의 돌잔치에서 다시 만났을 땐 그녀는 내게 아무 질문도 없었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 놓은 채 그저 분주히 뷔페 음식을 챙겨 먹고 있었다. 해방과 평등 같은 데 큰 관심이 없었던 엄친아 남편과 중국 도우미 아줌마라는 시스템이 그녀가 꿈꾸던 단란한 사적 육아를 대체하고 있었다. 맛있게 식후 끽연을 즐기며 아직 노총각인 남자 동기에게 아직도 애인이 없으면 언제 결혼할 거냐고 놀려대며 유유히 가래를 뱉어냈다. 잠시 뒤, 그녀는 바쁘게 자신의 노동 현장으로 돌아갔다. 혼돈이 조금 가라앉은 느낌 때문이었을까. 날이 무디어졌고, 주근깨도 늘었고, 살도 쪘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어여뻐 보였다.

얼마 전, 말 못할 트라우마를 안고 멀리하던 그 여성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대됐다. 삶의 여정 속에 유연해진 그녀처럼 어느새 남자 감독에게도 문호가 열린 큰 영화제로 성숙해 있었다.

피카소 말처럼 예술은 그야말로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짓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심사하는 내내, 보부아르가 그 두꺼운 <제2의 성>에서 다룬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속 여성의 불평등한 삶에 대한 어떤 세세한 묘사보다 또렷하게 자신의 질곡을 암시해준 그녀의 질문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쇠스랑·곡괭이를 들고 혼란스러워하던 20세기 초 러시아의 문맹 노동자·농민들에게 어떤 긴 혁명 강령보다도 큰 영감을 줬던 짧은 영화 <전함 포템킨>처럼, 남녀평등에 대한 신비로운 비전보다도, 그녀가 밟고 선 모순 한 조각이라도 깊이 일깨워주는 거짓말들이 더 어여쁜 것을.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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