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인간유전체계획이 무병장수의 불로초로 포장되던 시절, 한국 식품공학과들은 앞다퉈 생물공학과 혹은 유전공학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곧 생물학과도 전통적인 간판을 버리고 생명과학과로 갈아타기 시작해 이젠 생물학과를 찾는 일이 더 어렵다. 필자가 연구하는 대학은 여전히 고리타분한 생리학과 간판을 걸고 훌륭한 연구를 수행중이다.
한국의 교수 채용 기준엔 작명 실력이 포함되어 있다. 가정학과라는 간판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순결학과라는 기괴한 이름이 등장하는가 하면, 경영학과로는 모자라 얼굴경영학과가 등장했다. 간판 교체는 명문 대학일수록 꼴불견이다. 창조경제가 박근혜 대통령의 슬로건으로 걸리기 무섭게 서울대는 창조경영학과를 신설하겠다고 나섰다. 융합과 통섭이 유행하던 몇년 전에 이미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을 창조한 곳이다. 그 훌륭한 작명 실력의 교수들이 왜 통섭학과는 만들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유행에 민감한 이공계와 상경계열만이 아니다. 고전과 역사를 다루는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힐링이 대세로 떠오르자 한 철학과는 간판에 ‘상담’을 넣어 철학상담학과로 변신했다. 충남대 자유전공학부는 인문학의 상징인 르네상스 분위기에 맞춰 ‘다빈치 스쿨’로 개명을 했는데, 이젠 존폐의 기로에 놓여 있다고 한다. “차라리 ‘철학힐링학과’로 변경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다. ‘힐링’이라는 외국어가 들어가야 우리 경향과 수준에 더 맞는다.” 철학자 김영건의 냉소다.
간판주의는 능력보다 출신 배경을 먼저 보는 사고방식을 뜻한다. 내용보다는 포장을, 실력보다는 간판을 중시하는 중세적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출신 배경에 상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진 않다. 하지만 간판주의 사회에선 출신 배경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서열화한다. 간판주의가 그 사회의 지배적 잣대가 되면 해당 사회는 곧 불행해진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전파상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유머가 도는지 모른다.
간판주의의 심각성은 상류층과 사회 지도층에서 간판주의가 더욱 잘 작동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초일류기업의 손자는 사회적 배려 대상자가 되면서까지 국제중에 입학한다. 정부 부처의 간판이 바뀌는 건 5년마다 벌어지는 행사가 됐다. 정치인들은 정당 간판을 수십번씩 바꿔 다는 것도 모자라서 국회 목욕탕에서까지 서로에게 위원장 자리를 수여하며 낄낄댄다. 국회목욕탕 탕 내 수압조절 위원장은 정몽준 의원이라고 한다.
한국의 간판주의는 사대주의와도 직결된다. 대학은 ‘지방-서울-미국’이라는 위계 속에 놓이고 사회는 그 간판의 위계를 실력으로 믿고 따른다. 하버드 출신이면 어느 분야에서든 성공할 수 있다. 하버드 출신 강용석·이준석은 연예인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 인수위 시절부터 영어 조기교육을 주장하던 정부에서 동사무소는 주민센터가 되었고, 수자원공사는 케이워터(K-WATER)로 전락해버렸다. 국호는 왜 ‘크리에이티브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로 바꾸지 않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사대주의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봉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외국 학자들에게 한국은 바캉스 비용을 버는 놀이터다. 지난 정부에서는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을 육성한다며 최소의 국내 체류기간도 지키지 않는 함량 미달의 외국 교수들에게 아까운 연구비를 퍼줬다. 간판주의는 진보와 보수도 가리지 않는다.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라는 간판을 내건 한 대학은 동유럽의 스타 철학자 지제크를 석좌교수로 임용한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지제크가 그 대학의 시간강사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과학계도 도라(DORA)선언을 통해 저널 인용지수만으로 업적을 평가하는 간판주의에 경종을 울린 바 있다. 간판주의. 독이 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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