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열람위원들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찾기 위해 국가기록원에서 검색을 한 21일 국가기록원 직원들이 자료를 가지고 대통령 지정기록물 열람실로 향하고 있다. 성남/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어설픈 양비론으로 핵심 흐리지 않겠다
대통령·정당·언론 수준 적나라하게 드러나 참담하다
대통령·정당·언론 수준 적나라하게 드러나 참담하다
어설픈 양비론으로 핵심을 흐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서해 북방한계선(엔엘엘) 공방으로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 또 무엇을 잃었는지 차분하게 따져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전말은 간단하다. 선거개입 사건을 물타기 하려고 국가정보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 국회는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대화록 원본을 열람하기로 의결했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에는 대화록이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24일 기자들의 질문에 청와대가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진흙탕 싸움에 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처음부터 엔엘엘 공방의 당사자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기간 내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 발언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금 많은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에 별문제가 없다고 알게 됐다.
더구나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대화록 공개 전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시나 결재를 받았을 것으로 국민들은 믿고 있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을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사건으로 호도해 문재인 후보를 몰아붙이던 동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흙탕물이 이미 치마를 흥건히 적신 것이다.
새누리당은 정쟁에서는 이겼지만 안보를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이비 보수 정당임이 확인됐다. 대선 전에는 표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했다고 쳐도, 겨우 국정원 댓글 사건을 물타기 하려고 엔엘엘 논쟁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졸렬하다. 새누리당이 진정한 보수 정당이라면 국정원과 국가기록원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추진할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은 엔엘엘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라고 북한에 호통을 쳤어야 한다.
24일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정조사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을 수사해서 기소한 검찰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몰아붙였다.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상식의 눈을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국정원 댓글공작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이 오히려 훼손되었다. 민심은 국정원의 공작에 놀아날 만큼 어리석지 않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을 이번 기회에 근절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당 의원은 없었다.
문재인 의원은 지난 6월30일 국가기록원 문서 열람을 제안하며 “만약 엔엘엘 재획정 문제와 공동어로구역에 관한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입장이 북한과 같은 것이었다고 드러나면 사과는 물론 정치를 그만두는 것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에도 걸지 않았던 정치생명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자신의 결백에 건 것이다.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쓴 결정이었다.
그리고 7월23일 성명에서는 “국민들의 바람대로 엔엘엘 논란 더 이상 질질 끌지 말고 끝내자.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에 의하더라도 엔엘엘 포기가 아니라는 것이 다수 국민의 의견이다. 거기에 열람 가능한 기록물까지 살펴보면 진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이런 취지의 성명을 6월30일에 냈어야 했다.
문재인 의원에게 끌려다닌 김한길 대표와 전병헌 원내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도 결국 바보가 됐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민주당 지도부의 안목과 판단 능력은 10년 집권 경험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건을 이 지경으로 만든 데는 언론의 책임도 컸다.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방송, 일부 수구 성향의 신문은 국익을 외면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흠집내기에 몰두했다. 국가기록원에 문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이후에는 갑자기 ‘친노’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며 민주당 내부를 이간질하고 있다.
이들이 ‘노무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그래서 결국 승자는 누구일까? 댓글사건 물타기에 성공하고 정쟁에서 이긴 국정원과 새누리당일까? 정말 그럴까? 이번 사태로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 정당, 그리고 언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적나라하게 알게 됐다.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대화록 늪’, 허우적대는 민주당 [한겨레캐스트 #138]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연재성한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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