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에서 더 인기가 높은 베스트셀러 작가 더글러스 케네디의 최근 소설 <모멘트>는 통일 이전의 독일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미국인 여행작가 토머스가 베를린에 갔다가,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여성 페트라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소설에선 중요한 내용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페트라가 서독으로 넘어왔을 때 서독인들이 페트라를 보살피는 과정이었다. 보호관찰인은 페트라를 데리고 다니며 가구와 그릇을 함께 고르는 등 실질적인 후견인 노릇을 한다. 낯선 땅에서 혈혈단신으로 살아야 하는 망명자의 처지를 따뜻하게 감싸안는 태도가 특별했다.
탈북자들이 남쪽에서 겪는 경험은 판이하다. 이들이 처음 가는 곳은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다.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 경찰이 합동으로 캐묻는(신문하는) 곳이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국정원이 운영한다. 이곳에서 간첩 혐의는 없는지,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등의 심사 관문을 통과해야 한국 생활을 안내해주는 하나원 등으로 갈 수 있다. 최장 6개월까지 합법적으로 구금할 수 있으니, 오자마자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변 변호사들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변호사 접견조차 허용하지 않는 합신센터를 한국의 관타나모라고 부른다. 관타나모가 이교도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시설인 데 비해 합신센터는 같은 동포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좀더 고약하다.
민변 변호사들과 인권단체의 말을 종합하면, 이곳에 가면 일단 백지를 주고 살아온 과정을 무조건 쓰게 한다고 한다. 그것도 여러번. 그러다 보면 전과 다르게 쓰는 경우도 있기 마련인데, 그러면 거짓말한다는 호통을 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있지도 않은 일을 추가하기도 하고, 반복적으로 쓰고 읽도록 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서울시 탈북 간첩 사건의 여동생 유아무개씨가 직접 겪었다고 주장한 일이다. 유씨는 합신센터에서 오빠(서울시 공무원)가 간첩 혐의로 구속되는 데 결정적인 증언을 한 뒤, 법정에서 이를 부인하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달콤한 희망과 회유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유씨의 경우도 “우리 말을 잘 들어야 여기를 빨리 나가 오빠와 함께 살 수 있다”며 하나원으로 가는 버스를 수시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한국 실정에 어둡고, 빨리 합신센터를 나가고 싶어하는 탈북자들에게 기관원들의 회유는 쉽게 떨치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해법은 최소한 동포의 정을 느낄 수 있는 형태로 합신센터 운영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었을 때 탈북자들은 남과 북 사이에 깊이 파인 골을 메우는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사람들이다. 그리고 국정원 개혁방안으로도 나왔던 얘기지만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없애는 게 맞다. 조작간첩 전성시대를 주름잡던 공안검사들과, 북한의 위협이 사라지면 밥그릇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강성 군부가 핵심 요직을 차지한 정부를 두고 이런 얘길 하자니 좀 허망하긴 하지만 하여간 그렇다.
소설 <모멘트>의 여주인공 페트라는 동독에 두고 온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동독 비밀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간첩 노릇을 한다. 그러나 페트라의 간첩활동은 오래지 않아 미국과 서독의 정보망에 걸려들고, 페트라는 토머스로부터 야멸찬 버림을 받는다. 미국과 서독의 첩보당국은 동독 비밀경찰에도 요원(휴민트)을 두고 있었다. 이런 활동을 하라고 첩보기관에 비밀을 보장하고 천문학적인 예산을 지원하는 것이다. 골방에서 댓글이나 달고 국내 정치에 개입하라고 주는 게 아니다.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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