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다문화’라는 박제 / 박권일

등록 2013-08-12 19:31

박권일 칼럼니스트
박권일 칼럼니스트
어느 기업 임원이 항공사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이 이슈가 된 지난 4월, 트위터에서 “‘블랙 컨슈머’라는 단어는 ‘콩글리시’가 아닐까”라고 쓴 적이 있다. 블랙 컨슈머는 상품에 대해 무리한 문제 제기를 지속하는 악의적 소비자, 쉽게 말해 ‘진상 손님’을 의미하는 말로 한국에서 통용된다. 그런데 영어 단어 ‘black consumer’로 구글링을 해봤더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흑인 소비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영어가 모국어인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영어권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진상 손님’이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단순히 ‘콩글리시’냐 아니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인종차별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스타 중 한 명인 김태균씨(한화 이글스)는 지난 6월 라디오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외국인 투수 쉐인 유먼을 두고 “얼굴이 너무 까맣고 하얀 이와 공이 겹쳐 보여 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인종차별적 발언이란 지적이 쏟아졌지만 김씨 쪽은 “농담이었을 뿐”이라며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변명하기 급급했다. 그러다 여론이 험악해지자 그제야 사과를 했는데 유먼과 만나거나 전화 등을 통해 사과한 게 아니라 구단을 통한 ‘사과 표명’이었다. 이후 유먼은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소속 구단 롯데와 직접 사과하지 않은 김씨에게 실망감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사회적 혐오와 차별이 드러나는 양태를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내부의 타자(전라도 사람 등)를 배제하는 형태이거나 아니면 외부의 타자(‘못사는 나라’ 혹은 어두운 피부색의 외국인)를 비하하는 경우다. ‘일베’의 “홍어” 운운이 전자의 전형이라면, 프로야구 선수 김씨의 ‘검은 얼굴 흰 치아’ 발언은 후자의 전형이다. ‘블랙 컨슈머’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후자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다. 전자가 명백한 의도를 가진 혐오 발언으로 종종 표현되는 반면, 후자는 대개 ‘아무 생각 없이’, ‘무심결에’, 또는 ‘농담’으로 표출되곤 한다.

하지만 “한국은 다문화주의에 역행하는 인권 후진국”이라는 식의 관성적인 비난으로 문제를 뭉뚱그려선 곤란하다. “‘살색’이란 단어는 백인중심주의적 발상”이라는 ‘정치적 올바름’이 박수를 받는 사회가 요즘의 한국이다. ‘다문화주의’가 한국처럼 빠른 속도로 보편적 담론이 된 나라는 극히 드물다. 한국의 주류 진보와 주류 보수가 공히 동의하는 두 개의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다문화’이다(물론 다른 하나는 ‘반일’이다). ‘검은 얼굴 흰 치아’ 발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김씨를 비판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씨는 끝내 직접 사과하러 가지 않았다. 롯데 자이언츠는 자기 팀 선수가 인종차별 발언의 피해자가 됐음에도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깜둥이 새끼”라는 욕설과 잔혹한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

요컨대 문제는 다문화주의 따위가 아니다. 누구나 입으로는 다문화를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인종주의적 혐오 발언, 착취와 배제가 일상화되고 심지어 더욱 강해지고 있는 이중적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문제이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용의 감수성은 결코 무시되어선 안 될 미덕이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저 자신의 정치적 공정함을 확인하는 마스터베이션에 그칠 따름이다. 극우주의, 인종주의는 다문화주의 담론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담론과 현실의 괴리, 그 간극이야말로 소수자 혐오와 인종차별의 비옥한 온상이며 오늘날 정치의 결정적 공백이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한겨레 인기기사>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이제 그만 병을 키우십시오”
전두환 육사에 호쾌한 기부, 그러나 그것은 ‘빈틈’의 시작
“10대이지만 나도 아빠라구요”, ‘싱글 파더’들 뿔났다
열대야로 잠을 잊는 그대에게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숙면 비법’
[화보] ‘피서’ 대신 ‘촛불’ 든 10만 시민 “박 대통령 사과하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경호처를 대통령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권태호 칼럼] 1.

경호처를 대통령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권태호 칼럼]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2.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사설] ‘법 위의 윤석열’ 응원한다며 관저 달려간 국힘 의원들 3.

[사설] ‘법 위의 윤석열’ 응원한다며 관저 달려간 국힘 의원들

[사설] 탄핵심판에서 내란죄 제외, 전혀 논쟁할 일 아니다 4.

[사설] 탄핵심판에서 내란죄 제외, 전혀 논쟁할 일 아니다

‘개같이 뛰고 있다’…쿠팡은, 국가는 무얼 했나 [6411의 목소리] 5.

‘개같이 뛰고 있다’…쿠팡은, 국가는 무얼 했나 [6411의 목소리]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