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저자
어느 새벽, 9살과 7살인 두 아들이 일어나 카드게임을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둘째가 크게 운다. 가서 사태 파악을 하는데, 서로 상대가 먼저 때렸다고 한다. 진위를 파악하다가, 본의 아니게, 거짓말한 아이는 귀신이 와서 잡아간다는 말을 하게 됐다. 큰아이는 끈질기게 “과연 귀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파고든다. 아빠는 귀신을 보았는가, 귀신이 있다면 왜 보이지 않는가. 그 와중에 둘째가 질문을 던진다.
“귀신은 좋아요 나빠요?”
“나쁘지.”
“그런데 나쁜 귀신이 왜 나쁜 아이를 잡아가요?”
국가 정보기관이 국내정치에 개입했다. 불법이고 나쁜 일이다. 정보활동을 위해 훈련받은 요원이 선거 결과를 조작해 국가의 안정을 망치려 했다. 하지만 더 나쁜 일은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훼손한 것이 또 다른 국가기관인 경찰이었다는 것이다. 서울경찰청장의 지시로 경찰은 국정원 사건 조사 결과를 대선 후보들의 토론회가 열리던 날 밤 기습적으로 왜곡 발표했다. 왜곡된 내용은 선거가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검찰의 조사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쁜 일은 국가기관의 부정을 밝혀내고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언론이 침묵하는 것이다.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서 쓴 언론들은 그 발표가 허위로 드러났는데도 사실관계를 엄밀하게 규명하지 않았다. 자신을 속인 자들에 대한 상식적인 분노가 결핍되어 있다. 국정원과 경찰과 언론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건 민주주의의 위기인데 폭염 속에서 공분을 표현하는 건 평범한 시민들이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복잡한 이해관계를 이루고 사는 사회에서 무엇이 정의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소득세 인상이 옳은가 아니면 재산세 인상이 옳은가?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하는 환자를 위한 생명연장장치는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남은 가족들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이 옳은가? 자신이 속해 있는 계급과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판단은 다를 것이다. 정치이념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정치적 가치를 믿고 다른 정당과 후보를 지지한다. 하지만 대통령으로 누가 당선되는지는 생각보다 우리의 삶에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국정원 사건의 진실이 묻히고 관련자들이 득세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건 고통스럽다. 선악의 구분과 정의의 개념은 간혹 모호할 수 있지만 그 정도로 몽롱하면 우리의 삶은 무간지옥과 다를 바 없다.
중앙정보국(CIA)이 국내 선거에 개입하고, 연방수사국(FBI)이 선거 직전 왜곡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일이 미국에서 일어나기는 어렵다. 치열한 견제와 치밀한 균형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미국의 언론들은 이념적 성향에 상관없이 그 사건의 사실관계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념적 성향과 무관하게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공리적 차원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미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이해관계를 떠나 옳고 그름의 문제에 더 천착하는 정치인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정원 사건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는 하지만 기회일 수도 있다면 그 때문이다. 이제는 보수와 진보를 따지지 말고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정치적 득실 대신 어떻게 이 사건을 다루는 것이 정의인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진짜 보수주의자가 누구인지, 가짜 진보주의자가 누구인지,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는 지점에 서 있다.
7살 아이에게 정의란 나쁜 아이를 잡아가고 착한 아이를 지켜주는 것이다. 귀신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건 안다.
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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