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동 영화감독
엄마가 멋진 바다를 보며 감탄했다. “저, 에메랄드빛 바다 좀 봐봐!” 함께 보던 딸이 대답했다. “어, 파워에이드 빛 바다인데요?” 서로 마주보더니 갸우뚱한다. 세대를 넘어서는 바다의 진짜 색깔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동굴 속 석회암에 감탄할 때 난 그곳 웅덩이에 갇혀 사는 물고기의 세계가 궁금했다. 밤이 되면 동굴은 물고기 눈에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새벽빛이 스며들면 그것은 다른 사물이 된다. 해가 넘어가 반대에서 오는 역광은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 물고기가 이해하고 있는 세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있다. 그를 지독히 사랑하는 한 여자가 그에게 살인한 과거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여자는 남자를 원래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여자는 갈등 끝에 남자를 버린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남자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란 걸 증명한다. 여자는 오해를 딛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한데, 검사 결과가 남자의 조작으로 인한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 여자는 다시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살인의 동기가 애인을 구하기 위한 희생적인 정당방위란 게 밝혀진다. 여자는 어렵게 다시 돌아온다. 여기에 또 뒤집고 비트는 빛의 시간축이 더해지면, 깨졌다 봉합되는 그 사랑의 본질에 깊은 질문이 던져진다. 이렇게 어떤 빛을 비추냐에 따라 그 빛이 있기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영화 만들기는 진실의 빛으로 사실의 본질을 찾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보면 일견 대단해 보이지만, 그 작업의 대부분은 어처구니없게도 주로 컴퓨터 앞에서 이루어진다. 제아무리 뛰어난 상상을 하더라도 우선은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는 모니터가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점멸하는 커서의 지옥에서 빠져나오고픈 마음에 거리로 나섰다가 이리저리 밀리며 불쾌지수가 치솟았다. 하지만 이내 펼쳐진 촛불들의 물결에 눈이 부셔 주춤했는데, 문득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중략)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중략)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실상 2시간 안팎의 시공간으로 초대하는 영화라는 그릇은 얼마나 작은가. 그곳에 우주의 본질을 담는다면… 이라고 위로하면서 버티고 있지만,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면, 촛불 한 줌 뜨겁게 밝힐 수 없는 허무한 마술쇼가 되고 마는 터이니.
주눅든 와중에 떠올려보니, 48년 8월의 고궁 앞은 막 태어난 ‘반민특위’를 연호하며 혼탁했던 과거를 청산할 흥분에 달뜬 군중들로 가득했다. 하나 누구도 그 우람찬 출범이 1년도 안 돼 반공투사들을 억압했다는 이유로 풍비박산 날 거라곤 예측 못 했을 것이다. 또 마치 실록 속 광해의 이중생활처럼 후대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한 전설로 사라질 거라곤 상상 못 했을 것이다.
난 서둘러 돌아와 모니터를 마주하고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 이야기에 다시금 빛을 비춘다. 벌써 고추잠자리를 보았다. 세월도 망각도 광속이니, 김수영의 시구처럼,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이다.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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