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그 사람들 정말 전쟁이 나면 전화국을 파괴하려고 했나요?”“총을 준비해 내란을 음모했다는 보도가 정말인가요?”
지난 토요일 한 등산 모임에 갔다 받았던 질문들이다. 모임 참석자는 40·50대 중소기업체 사장, 대기업 간부들이다. 정치 성향을 굳이 따지자면 중도나 보수 쪽이다. 이들은 “당신은 기자이니 알 거 아니냐”며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이 참석한 ‘5월 모임’에 대해 물어왔다. 이들의 기대와 달리 나는 이 사건의 실체에 대해 모른다. 게다가 내 개인 생각을 한겨레신문사의 의견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말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국정원은 ‘체제 전복 내란음모’라고 주장하는데 진보당은 ‘허위 사실 왜곡 날조’라고 주장하니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알맹이 없는 내 답변이 답답했던지 50대 중반 중소기업체 사장이 나섰다. “그런데 좀 웃기지 않아요. 백명 좀 넘는 사람들이 장난감총 개조해 들고나와서 내란을 하겠다니….” 나는 “무장폭동을 하겠다는 보도가 있는데 무섭지 않나요?”라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40대 후반 대기업 간부가 “무섭긴요. 황당했어요.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죠. 불쌍한 사람들이니, 형사처벌이 아니라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뜻밖이었다. 국정원이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의 처단’을 목적으로 하는 무시무시한 내란죄를 걸어 수사중인데, 이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은 전혀 체제전복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에겐 이른바 지하혁명조직이란 아르오(RO)가 꾸몄다는 ‘내란음모’가 공포가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었다.
등산을 마치고 오후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대학교수로 일하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대뜸 “형, 이석기 사건 진실이 뭡니까”라고 물었다. 꼬치꼬치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후배라 길게 이야기하면 토요일 오후가 피곤할 것 같아 “지금까지 나온 언론 보도 빼면 나도 아는 게 없어”라고 서둘러 말을 잘랐다. 그랬더니 “팩트가 없으면 형 의견이라도 말해봐요”라고 후배가 따라붙었다.
나는 “기자는 대답하는 게 아니라 묻는 게 직업이다. 네 생각부터 먼저 말해봐”라고 공을 넘겼다.
후배는 “녹취록을 보고 새롭거나 놀라지 않았어요. 80년대 후반 대학 다닐 때 엠티 때나 세미나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가끔 들었던 이야기니까요. 제가 대학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80년대 후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 안타깝기도 하고 신기했어요”라고 말했다.
후배는 “진보개혁 세력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우선 국정원의 속 보이는 국면 전환 드라이브를 비판 저지해야겠지.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진상 규명과 국정원 개혁은 이번 사건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나는 “통합진보당은‘종북 프레임에 맞서 진보개혁 세력이 대동단결 대동투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라고 물었다.
후배는 “국정원의 물타기 수사가 분명하지만, 국정원과 민족해방(NL) 세력은 종북 프레임을 매개로 각자가 처한 위기를 돌파한다는 측면에선 적대적 공존 관계라고 생각해요. 두 집단은 북한에 대한 박멸과 추종이란 낡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잖아요.”
나는 “그동안 엔엘이 진보개혁 세력을 과잉 대표해온 데는 진보개혁 세력의 방관도 한몫했다고 본다. 일단 사태가 진정되면 이 부분에 대한 진보개혁 세력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석기 5월 모임’을 이야기하다 토요일이 다 갔다. 일요일에 출근해야 하는데, 피곤한 하루였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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