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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국회의원의 팩트 파인딩 / 임범

등록 2013-09-02 19:33수정 2013-09-03 10:55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국정원 청문회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기자들이 떠올랐다. 특종하려고 무리수를 두는 기자들. 요즘도 기자가 재판받는 기사를 본다. 몰래 녹음하고, 다른 직업 사칭하고…. 전에도 그랬다. 민간인에게는 경찰 사칭하고, 관공서 가서는 서류 훔치고. 내가 기자 생활 시작할 때 한 선배가 그랬다. 훔친 서류에 특종 거리가 담겨 있으면 된다고. 그게 보도되면 관공서에서 서류 훔친 걸 문제 삼지 못한다고. 서류 관리 잘못한 자기들도 문책당할 것이고, 만약 그 특종이 관공서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지들 잘못 반성 안 하고 기자들에게 보복한다’는 소리 듣게 되니까 문제 삼지 못한다는 거였다. 반면, 훔쳤는데 이렇다 할 내용은 없고 훔친 사실만 들통나면 시범 케이스로 호되게 당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검사 방 캐비닛에 숨어 들어가 있다가 들키고, 식당 배달부로 가장해 조사실에 들어가다가 들통나고, 공무원의 민원을 들어주고 구워삶아 정보를 빼내다가 출입처에서 쫓겨나고…. 내가 정당 출입할 때, 당 간부 회의를 문틈으로 엿듣다가 한 간부가 문을 열어 얼굴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간부 왈, “점잖으신 분이 참….” 그러게. 점잖으신 분들이 왜 그럴까. 점잖지 못한 일, 창피한 일, 심지어 불법인 일까지 마다하지 않을까.

기자 개인의 특종 욕심도, 언론사 간 경쟁도 있겠지만 한 직업집단 전체가 저러고 있는 데는 더 큰 이유가 있을 거다. 언론의 존재증명을 위해서가 아닐까. 팩트(사실)가, 그것도 누군가 꼭꼭 숨기고 있는 팩트가, 점잔 떠는 이에게 제 발로 찾아와 줄까. ‘결국 기자들이 터뜨리네. 역시 언론이 있어야 해.’ 이 말을 듣기 위해, 아니 그런 목적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집단 무의식에 이끌려 오늘도 기자들은 점잖지 못한 일을 할 거다.

나는 국회의원도 팩트 파인딩(사실 찾기)을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기자가 갖지 못한 여러 권한이 있다. 면책특권이 있고, 관공서에 자료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국회로 사람을 불러 조사할 수도 있다. 조사를 돕기 위해 보좌관도 여러명 붙여준다. 팩트를 찾으라고 그러는 것 아닌가. 여러 권한에 더해 기자들처럼 점잖지 못한 일까지 한다면 꽤 많은 팩트를 찾아낼 것 같다. 국정원 청문회를 보면서 기자들이 떠오른 이유다.

증인들의 무성의한 태도, 여당의 방해 같은 건 이미 예상했다. 답답한 건 새로운 팩트가 빈약하다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점이었다. 아마추어가 아니라면, 팩트 파인딩이 안 됐을 때 청문회가 어떻게 될지 충분히 예상했을 거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할 거고, 질문은 예상 범위를 넘지 못할 거고, 대답은 더 뻔해서 보는 이의 혈압만 높일 거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러면 그렇게 혈압이 오르면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커지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악당의 실체를 드러내면 된 거지, 국회의원이 무슨 팩트 파인딩을 하냐고? 그렇게 되묻는 국회의원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염증을 키워서 정부를 공격한다? 가미카제 특공대도 아니고, 국회의원이 스스로 국회를 망가뜨리려고 하지는 않을 거다. 이번 청문회의 팩트 파인딩을 위해 노력도 했을 거다. 하지만 절박해 보이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팩트 파인딩에 혈안이 돼 점잖지 못한 일을 했거나, 무리수를 둬 문제가 됐다는 기사라도 봤다면 그런 생각이 덜할지도 모르겠다.

국회의원들은 열심히 팩트 파인딩을 해서, 청문회가 얼마나 멋진 제도인지 보여주고, 국회의 존재증명을 해야 했다.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가 떠오른다.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 이런 게 민주주의구나, 감탄했던 기억들. 역사가 후퇴해선 안 될 텐데.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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