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그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형제와 친구, 애인이 살해당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봤으면서도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 도망칠 기회가 있었지만 책임을 다 마칠 때까지 이탈하지 않았고, 떠날 때엔 가진 돈을 모두 내놓았다. 달아난 뒤에도 경찰에 밀고하는 배신 따위는 없었다.
올해 우리말로 옮겨진 책 <적군파>(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는 1972년 산속에 은신해 있던 일본의 급진적 운동권(연합적군) 젊은이들이 ‘공산주의화’라는 목표를 위해 ‘총괄’(자아비판)을 하다 집단폭력으로 동지 12명을 죽인 비극을 다룬다. 지은이의 의문점은 이거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젊은이들이 왜 폭력을 방치했는가? 왜 집단광기에 휘말렸는가? 어떻게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는가?
갑자기 40여년 전 일본의 적군파가 떠오른 까닭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5월 모임’ 녹취록 파문 때문이었다. 물론 적군파와 녹취록에 나타난 ‘이석기 그룹’은 여러 점에서 다르다. 적군파는 적극적인 무장투쟁과 세계동시혁명을 꿈꾼 데 반해 이석기 그룹은 혁명가를 자처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정당이라는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에 치중해왔다. 적군파는 수백명의 경찰과 며칠씩 대치할 정도로 총기와 폭탄 등 무장력을 갖추고 실제로 싸웠지만, 이석기 모임은 전쟁 등 유사시에 대비한 물질적 준비를 논의하는 ‘구상’ 단계였다.
그럼에도 양쪽의 모습이 겹쳐지는 이유는 양쪽 모두 ‘이상적 사회’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녔으면서도 ‘고립된 집단주의’를 강화하며 ‘상식’과 멀어져 갔다는 점이 비슷하게 느껴져서다. 왜 이석기 그룹은 정세판단 능력이 박약하게 된 걸까? 왜 제도권 정당인이 합리적 해명 없이 무책임한 자기정당화에만 골몰할까?
한국학중앙연구원 임미리 박사의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이라는 논문을 보면, 이석기 의원이 속한 파벌인 경기동부연합은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폭력적 철거, 강제이주, 차별과 배제에 대한 울분은 성남을 중심으로 야학·빈민운동·노동운동이 불타오르는 계기가 됐고, 이는 정당운동으로 이어져 통합진보당 전신인 민주노동당의 지역 기반을 일궜다.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활동가들은 합숙생활을 하면서 신문·우유 배달로 번 쥐꼬리만한 돈마저 공동체에 내놓는 헌신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1990년대 이후 각종 조직사건으로 위축되고, 정치경제 시스템이 망가진 북한을 여전히 이상시하는 교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탄압과 고립은 정치적 발달장애를 낳았다. 이들에겐 외부의 비판도 곧 탄압이었다. 피해의식은 성찰의 눈을 가려버렸다.
다시 <적군파>로. 지은이는 외부세계로부터 차단된 소규모 조직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지적한다. 고립된 조직 내 개인들이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에 불일치를 경험하게 되면 아예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경찰의 눈을 피해 깊은 산에 숨은 적군파들은 이데올로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눈과 귀와 마음을 닫았고, 조직의 결속과 지도자의 권위에 굴복해 ‘아니오’라고 말하기도 잊었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이 연합적군파 숙청사건을 계기로 궤멸 상태에 이른다. 자폐적 죽음의 이데올로기에 올라탄 이들이 빚어낸 거대한 참극 앞에서 일본의 양심적 시민세력도 고개를 돌렸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는 녹취록에 나온 총기 탈취 등의 발언이 ‘농담’이었다고 했다. 이 모든 게 농담에서 비롯됐다니, 너무 심한 농담 아닌가. 한국 시민들이 이들의 성찰 없는 이데올로기에 실망해, 진보당에 몰아치는 수구공안의 칼날에 분노하기를 멈출 때, 이들의 거대한 농담은 거대한 비극으로 바뀐다.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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