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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네팔공주병 치유기 / 이유주현

등록 2013-09-29 19:18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으면, 가끔씩 이 병에 걸린다. 추석 연휴에 네팔에 취재하러 갔을 때도, 잠시 걸렸다. 낯선 남자들이 갑자기 잘해주면 걸리는 병, 공주병 말이다. 네팔공주병은 출장 초반부에 발병했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가까운 박타푸르라는 옛 도시를 어슬렁거리는데,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이 콧소리 가득 담아 ‘마담’이라며 불러 세웠다. 사진 찍어 달라는 말인 줄 알고 그들이 내미는 카메라를 덥석 잡았더니, 자기들과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한 명씩 차례대로 사진 촬영을 하고 나서, 나는 연예인들에게 대량 분비되는 엔도르핀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 듯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청년은 내가 땡볕에 길 잃고 헤매다 눈앞이 노래질 때 기꺼이 오토바이를 태워 줬으며, 또 어떤 청년은 먼저 다가와 가이드 역할을 자임했다. 솔직히, 그날 밤 거울 보고 싱긋 웃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가벼운 공주병은 곧 낫기 마련이다. 특히 ‘돈’으로 대표되는 냉정한 현실이 약이다. 마지막 날, 카트만두의 한 사원에서 ‘마이크’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는 내가 입장권을 끊을 때부터 졸졸 따라오더니, 물어보지도 않는데 칼리신이 이거고, 시바신이 저거고, 카마수트라가 어쩌고저쩌고 설명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 “참 멋지다” 등 ‘속는 줄 알면서도 속고 싶은 말’들로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가 침 튀기며 설명하는 사이, 나는 머릿속으로 마이크에게 사례비로 얼마나 주면 될지 주판알을 튕겼다. 좀 많다 싶게 돈을 꺼냈다. 그러나 그는 울상을 지었다. 두 배를 줬다. 그래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네 배까지 올려주고 나서야 거래는 끝났다.

그러는 사이 공주병은 씻은 듯 나았고, 덩달아 그만큼 기분도 상했다. 그러나 그는 돌로 만든 한 조각상을 가리키며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아름다운 조각상엔 몇백년 전 네팔을 침공한 이슬람교도들이 힌두교 사원을 습격해 저지른 만행이 처참하게 남아 있었다. 힌두교에서 정의의 신인 비슈누와 그의 일가족들을 새긴 조각상이었는데 모두들 목이 댕강댕강 잘려 있었다.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아주 힘들었지만 그래도 우리 네팔인들은 이곳을 지켰다. 우린 가난해도 늘 독립을 지켰다. 비록 영국에 영토를 많이 잃었지만 식민지였던 적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돈에 숨넘어갈 듯했던 그의 얼굴이 자긍심으로 빛났다.

마이크의 진지한 표정은, 지난해 만난 쿠바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음악과 춤의 나라, 쿠바는 참으로 매력적인 나라였지만, 미국의 혹독한 장기간 경제제재로 인해 국민들은 생필품에 굶주려 있었다. 길거리에서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으면 “볼펜 좀 달라”며 다가오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비록 초면의 외국인들에게 ‘원(one) 달러’만 달라며 손 내밀지라도, 그들에게선 자기 역사에 대한 깊은 자부심이 느껴졌다. 2012년 1월1일 0시, 쿠바의 동쪽 해안 도시 ‘산티아고데쿠바’에서 혁명광장을 가득 메우고 다 함께 ‘쿠바 리브레(독립만세)’를 환호하는 이들을 보며 나도 가슴이 벅찼다. 쿠바의 1월1일은 단순히 한해를 시작하는 첫날이 아니라 1959년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혁명을 이룬 날이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구체제와 외세의 수탈을 물리치고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만들어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온전한 기쁨, 기품 있는 긍지가 있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친일파의 미화, 독재정치의 정당화 움직임을 바라보며, 한국은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사적 기준 자체가 부재한 나라임을 절감한다. 네팔과 쿠바가 잘살게 될 날보다, 한국의 빈곤한 역사 감각이 최빈국 처지를 벗을 날이 더 먼 것 같아 슬프다.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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