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별로 두껍지 않은 복사본 한 부가 놓여 있다. 6년 전, 미국 프린스턴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 도서관에서 복사한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전시 중립 개념>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이승만이 1910년에 학위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대한제국이 강점당했는데, 요즘의 석사 논문 분량(도합 115쪽)인 이 박사학위 논문에서 ‘코리아’라는 국명을 찾는 것은 허사다. 이승만은 러-일 전쟁 때 고종의 전시 중립 선언이 결국 일본의 강압으로 무효화된 것을 6년 후인 1910년까지 생생히 잘 기억했을 터인데, 그의 출신 국가는 문턱 높은 프린스턴대학의 연구 대상에 오르기에는 그에게 참으로 하찮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에 대한 서술은 찬양조다. “미국의 독립선언은 만국의 평화를 증진시키고 무역의 자유를 장려하고, 특히 전시 중립의 권리와 의무 등과 관련하여 국제법의 원칙들을 확장시킬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렸다.”(14쪽) 참, “만국의 평화를 증진시키는 미국”, 이건 아부치고도 좀 심한 게 아닌가? 이승만이 이 글귀를 적었던 1910년에는, 1899년부터 미국에 강점당한 필리핀에서는 아직도 빨치산들이 정복자들과의 혈전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국제사정에 유독 밝았던 이승만이 이를 모를 리가 있었을까?
젊은 날의 이승만에게는 필리핀의 빨치산뿐만 아니라 조국의 빨치산들도 이질적인 존재들이었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의 강점에 적극 협조한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를 1908년에 저격한 장인환·전명운, 두 독립운동가를 위한 법정 통역을 거절한 바 있었다.
그러나 젊은 날의 이승만에게는 필리핀의 빨치산뿐만 아니라 조국의 빨치산들도 이질적인 존재들이었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의 강점에 적극 협조한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를 1908년에 저격한 장인환(1876~1930), 전명운(1884~1947) 두 독립운동가를 위한 법정 통역을 거절한 바 있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게 핑계일 뿐이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기독교 평화주의자였다면 왜 그 학위 논문에서는 예컨대 미국의 플로리다 세미놀족에 대한 침략전쟁을 “필요한 전쟁”이라고 긍정적으로 묘사했을까?(46~47쪽) 사실인즉 그게 루스벨트 대통령과 친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백인을 사살한 두 ‘유색인종’은 그저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는 그러한 ‘테러리스트’가 연상되지 않는 ‘명예백인’이 되고 싶었으며,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1909년의 안중근(1879~1910)의 의거마저도 비판적으로 봤다. ‘코리아는 테러리스트들의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미국 신문을 채우면 자신과 같은 젊은 기회주의자들의 주류 사회 편입이 어려워진다, 이것이었다.
기회주의 정신과 함께 그 당시 미국에서의 이승만에게 보였던 또 한 가지 특징은 출세를 위한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놀라운 수완이었다. 예컨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석과 참고문헌을 보면, 영어 저서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심지어 이탈리아어(!) 저서까지도 눈에 띈다. 이승만은 옥중(1899~1904)에서 영어 공부에 열중했으며, 미국에서의 길지도 못한 유학생활에서 늘 아르바이트 등에 시달리면서 난삽하기 짝이 없는 국제법 저서를 프랑스어로 쉽게 읽을 정도로 프랑스어를 스스로 공부했을 리가 만무했다. 또 조지워싱턴대학(학사)이나 하버드대학(석사) 등에서의 이승만의 성적표를 보면, 프랑스어를 공부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기존의 영어 개설서를 대충대충 베껴가면서, 본인이 제대로 읽지도 못한 책까지 참고문헌에 집어넣는 날림공부로 동포 사이에 ‘박사님’으로서의 권위를 얻으려고 했다고 결론을 내야 할 듯하다. 물론 오늘도 출세 일념으로 구미 유학 장도에 오르는 이들이 비일비재하니 굳이 이승만이 특별했다고 보기 힘들다. 특별했다면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그 오기 정도였을까?
이 비범한 기회주의자가 나중에 여러 가지 인연과 계기들의 조합으로 아예 미국의 군사보호령으로서의 남한의 대통령에까지 올랐으니 보수적 사학은 그를 철저하게 ‘재탄생’시키게 된다. ‘교학사 교과서’ 부류의 뉴라이트 계통의 서적들을 보면 알듯이, 그의 젊은 날의 곡학아세, 백인사회에 대한 아부적 태도, 적극적 독립운동에 대한 적대감 등은 간데없고, 오로지 ‘애국의 화신, 대한민국의 국부’만 남은 것이다. 북한에서의 김일성 못지않게, 그는 ‘민족의 태양’쯤으로 거듭난다. 실은 1950년대에 그에게 아부하는 지식인과 언론들은 그를 바로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야 1950년대는 황금기였지만, 일반인에게는 이승만 치하가 영화 <오발탄>에서 묘사된 것 같은 궁핍과 절망감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뉴라이트들은 다수의 역사 기억의 지형도까지 무리하게 무시하면서 이승만과 같은 수준의 인물을 거의 북한식이다 싶을 정도로 신격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수의 한국인에게 뻔하게도 오점이라고 인식되지 않을 수 없는 박정희 등의 친일 경력을 합리화하고,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감옥으로밖에 안 보일, 경찰이 자로 치마 길이를 재던 유신시절을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봐도 무리의 극치인데 사실 뉴라이트 식의 역사왜곡에는 아주 철저한 논리가 관철돼 있다.
기존 한국사 교과서라 하더라도 국가와 자본주의 본위로 쓰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건국과 성공’은 기존 교과서에서도 역사 서사 전체의 당연해 보이는 귀결이다. 그렇다면 왜 뉴라이트 집단이 교학사 교과서를 내놓는 등 역사교육의 국가주의적·자본주의적 편향을 더 심화시키려 하는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뉴라이트들로서는 기존 교과서에서 어느 정도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인의 반제국주의적·반항적 집단심성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일제 등 외세의 침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아직도 강한 한국인으로서는,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될 프린스턴대학의 총장 윌슨 등의 미국 유력자들에게 아부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는 도미 시절의 이승만,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보다는, 이승만이 경멸한 장인환이나 안중근이 훨씬 더 존경스럽다. 그들이 ‘살인자’라서라기보다는, 장기투옥이나 사형을 각오하면서 단행한 그들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살신성인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승만보다 4·19 때 총탄에 맞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승만 독재의 악몽을 끝내려는 일념으로, 자신만이 아닌 모두들의 행복을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은 더 많은 존경을 받는다. 애타적 정신이 담긴 집단행동 말고 외세에의 굴종과 독재로 얼룩진 역사를 바로잡을 방법이란 없다는 것을, 다수의 한국인이 경험적으로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퀘이커 함석헌은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주의자였지만, 한국 지식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고 제자들의 병역거부를 지지했는데, 그가 과연 뉴라이트들에게 평가를 받을 일이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집단의식을 ‘교정’하려는 것이 뉴라이트 역사운동의 뼈대다. 그들은 ‘민족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미명하에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그 어떤 대타적이며 반항적인 연대의식도 부정하고, 원자화된 개인들의 체제 순응과 출세를 위한 분투를 새로운 대한민국의 이상으로 삼는다. 반제 민족투쟁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이나 여성해방 투쟁, 반전투쟁도 똑같이 무용지물로 취급한다. 퀘이커 함석헌(1901~1989)은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주의자였지만, 한국 지식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고 제자들의 병역거부를 지지했는데, 그가 과연 뉴라이트들에게 평가를 받을 일이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일제든 대한민국이든 부당한 국가권력과 계속 대립해왔지만, 뉴라이트의 이상은 국가와 자본의 틀 안에서 ‘합리적인’ 출세와 치부를 꿈꾸는 자본가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민족’뿐만 아니라 가정 이외의 모든 집단 내지 타자들은 단지 이용 대상에 불과하다. 단, 그의 부를 지켜주고 그의 성공을 보장해줄 국가에는 그들은 철저하게 순종한다. 유신시대의 전체주의 국가라 해도 상관없다. 이 국가의 맨 꼭대기에 히로히토가 있든 노망이 든 ‘박사님’이 있든 상관없다. 외세든 무엇이든 노동자를 착취할 ‘자유’를 빼앗을지도 모를 빨갱이만 막아주면 다 된다!
이와 같은 ‘역사’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적 세뇌는 과연 한국인들에게 먹혀들 것인가?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세운 체제는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성공’은커녕 이제 단순한 생존도 보장하지 못하며, 가면 갈수록 그 한계를 노출한다. 그 체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뉴라이트의 ‘역사학’도 동반 침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