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꽃자리출판사 대표
김종서는 결국 수양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를 제거한 이후, 수양은 “이제 호랑이 사냥은 끝났다”고 말한다. 아버지 세종이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왕권의 제약을 받는 것을 보고 자란 수양은 왕권 강화를 자신의 정치적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자신이 세자가 아니고 왕이 아닌 상황에서 수양이 선택한 것은 역모였다. 그리고 그 역모는 성공한다.
영화 <관상>은 인간의 얼굴에 그려진 운명의 지도를 읽어내면서도 그와 함께 시대의 면모를 꿰뚫어보는 힘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특히 지도자들의 관상이 영화의 주제가 되고 있다. 김종서가 누구인가? 그는 장군이라고 불리지만 본래 무인이 아닌 문인 출신이었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함경도 동북부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다. 세종 사후 문종과 단종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계보에서 김종서는 날이 갈수록 권위가 높아지니 자연 수양은 이를 표적 삼아 정권 찬탈을 기도하게 되었다.
이제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과연 관상을 보면 그의 운명이 드러날까? 김종서는 호랑이상을 지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호랑이는 절대강자일까? 아니면 그 호랑이도 무릎을 꿇고 말 상대가 있을 것인가? 누군가는 처음에 이기는 자인 듯했다가 나중에 패자가 되고, 그 반대도 있다. 그런 운명의 역전을 미리 알아볼 방법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선거 때만 되면 역술인들을 비롯해서 관상에 능하다는 이들의 문전이 성시를 이룬다고 하니, 여전히 우리는 근대 이전의 풍속과 처세 그리고 인간관에 묶여 있다. 그들이 시대의 상을 통찰하고는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관상이라는 말보다는 이미지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얼핏 두 말이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관상이 그 당사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면, 이미지는 연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지는 때로 관상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이미지가 관상보다 위력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타자의 시선에서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는 의미다. 또는 관상은 변모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의 관상과 연륜이 쌓인 이후의 관상이 같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관상이든 이미지이든, 그것이 한 시대의 요구와 어떻게 만나는가가 더 중요하다. 왕정의 시대에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는 조건과 민주주의 시대는 그대로 통할 수 없다. 토론을 통해 설득력을 지닌 인물과, 위계질서의 통치에 익숙한 인물 가운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쪽은 당연히 전자이다. 다양한 견해를 하나의 틀 속에 유연하게 녹여내고 그것을 새로운 에너지로 창출할 수 있는 인격과 훈련만이 민주주의 시대의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과거에 승인될 수 있는 군왕의 관상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 마땅하다. 문제는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도자들이 스스로 군왕의 태도를 보일 때이다. 영화 <관상>은 한 개인의 관상을 뛰어넘는 시대의 얼굴을 볼 줄 모르면 실패할 수 있음을 토로한다. 이 말에 더해서, 지도자가 시대의 관상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현실을 밀고 나가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떠넘겨진다. 이미지를 적당히 만들어 팔아서 권력을 쥔 이후,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것이 시대의 요구와 충돌할 경우 그것은 비극이 된다.
대통령 박근혜의 관상은 어떨까? 시대의 요구와 맞는 모습일까? 요즈음 자꾸 그의 얼굴에서 유신시대의 유령이 겹쳐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대의 흐름과 어긋나는 이의 운명은 그 자신에게도 불행이다. 대통령이 될 관상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곧 행복한 결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더라. 그의 관상은 자꾸만 변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만들려고 해도….
한종호 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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