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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민중’과 ‘님비’ / 박권일

등록 2013-10-07 18:42수정 2013-10-08 16:13

박권일 칼럼니스트
박권일 칼럼니스트
“지역이기주의”나 “님비현상” 같은 단어를 일상에서 쓸 때는 조심스러워진다. 도덕적 비난의 뉘앙스를 강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특정’ 언론들, 곧 조·중·동은 거침이 없었다. 밀양 송전탑 건설에 대한 지역민의 반대를 단지 보상금 액수에 대한 불만인 양 몰아가는가 하면, “외부세력”의 개입을 언급하며 유독 “통진당”이란 고유명을 활자화한다. ‘이석기의 정당’을 돋을새김하는 속내는 뻔하다. “불순세력, 종북세력, 빨갱이들이 저쪽에 붙었다”는 소리다.

단도직입 묻건대 지금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갈등은 ‘님비현상’인가? ‘님비’라고 하면 먼저, 혐오시설 등이 동네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대도시 주민을 떠올리기 쉽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고 공공성, 또는 공적인 것(the public)에 일절 기여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중산층 말이다. 밀양에서 며칠째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며 국가-자본과 싸우고 있는 70대 노인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미지 아닌가. 그러니까 님비라 불러선 안 된다, 하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을 위험에 처한다. 그 위험은 이른바 진보진영의 뿌리 깊은 습속과 관련이 있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주민들을 순정한 희생양, ‘민중’으로 동결시키고픈 충동 말이다. 물론 그런 이상적 민중은 대개 운동권 신입이나 초보 지식인의 대뇌피질 속에만 존재한다.

일부 개혁성향 시민들이 “밀양 노인들 대부분 박근혜 후보 찍었을 테니 자업자득”이란 식으로 비아냥댄 것도 따지고 보면 유사한 심리다. 그들에게 민중은 ‘새누리당을 찍어선 안 되는 존재’인데, 만약 새누리당에 투표했다면 그 민중은 더는 ‘우리가 함께 싸워야 할 민중’이 아닌 것이다. 이런 태도는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제크가 즐겨 인용하던 농담을 연상시킨다. “내 여자친구는 절대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아. 왜냐하면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순간 더는 내 여자친구가 아니기 때문이지.”

‘님비현상’이란 말만큼 행정 관료와 토건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위험시설,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것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을 이기주의자들로 몰면서도 자신들은 공공성의 수호자인 양 갖은 생색을 낸다. 하지만 공공성이란 개념은 개인의 권리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며, 공동체의 초월적 목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공공성의 본질에는 ‘개인을 배제할 수 없는 주체로 인정하고 평등한 몫을 정당화하는 기반’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

한국의 공공성은 ‘사적인 것을 규제하고, 줄 세우고, 희생시키는 규칙 내지 도덕률’로 작동해 왔다. 그것은 일사불란하게 개인의 역할과 기능을 분배해서 위계질서를 유지시키는 일, 다시 말해 행정, 통치, 치안 같은 개념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다. 관이 하는 일이 곧 공적인 일이며 개인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는 점에서 한국의 공공성은 차라리 ‘관공성’(官公性)이라 불러야 적절하다.

밀양 사태를 사적 권리와 공적 행정의 충돌로 한정해 버려서는 안 되지만, 절대선과 절대악이 맞붙는 ‘도덕의 성전’으로 만들어서도 곤란하다. 대신에 도시 중산층이나, 밀양의 주민들이나 같은 몫을 지닌 평등한 주권자임을 집요하게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 정말로 ‘공적인 것’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시민적 합의에서 탄생한다. “우리 동네 안에 지어서 안 되는 것은 당신의 동네에도 지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며 반드시 지어야 할 건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싸움은 장기적으로 탈핵·생태사회로 좀더 빨리 이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결정적 분수령이 될 수 있다. 더 많은 “외부세력”이 함께해야 하는 이유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밀양 2967일, 폭탄이 된 주민들 [한겨레캐스트#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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