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천안함과 빨갱이 사냥 / 이라영

등록 2013-10-09 19:24

이라영 집필노동자
이라영 집필노동자
오랜만에 서울에 갔다가 기이한 경험을 했다. 세련된 옷차림에 스마트폰을 들고 첨단문명을 누리는 지하철 승객들 사이로 난데없이 ‘좌익사범’ 신고를 위한 111콜센터 어쩌고 하는 방송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불협화음에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는데 여러 번 듣고 보니 현실임이 분명했다. 좌익사범의 개념이 어떻게 정리되는지 궁금하여 111콜센터 누리집을 방문해보았다. 북한 누리집에 접속하는 자, 회원가입을 하고 자료 내려받기를 하는 자, 북한 트위터 계정을 재전송하는 자 등등이 모두 좌익사범 의심 유형에 해당된다고 한다. 여기서 ‘좌익’이란 곧 ‘종북’이요, ‘빨갱이’를 말한다. 우익사범은 어디에 신고해야 하나. 뜬금없이 궁금하다.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무시무시한 표어(?)가 곳곳에 있었던 어린 시절보다 세상이 더 유치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천안함 프로젝트>를 보았다. 좌익사범 신고를 위한 콜센터를 운영하는 사회답게 이 다큐멘터리는 개봉하자마자 상영이 중단되어 볼 수 있는 극장이 거의 없었다. 영화 상영조차 가로막을 정도로 이 사건의 진실을 묻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당하고 있다. 대신 2010년 3월에 일어난 천안함 사건은 지난 3년간 국회 인사청문회나 선거 후보자 토론에서 ‘종북’ 여부를 판가름하는 잣대로 아주 잘 활용되었다. 청문회에서 “북이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고 답했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는 결국 낙마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다. 좌익사범이 되지 않으려면 깔끔하게 ‘북한이 했다’고 답해야 한다. 천안함 사건이 누구의 소행이라고 생각합니까. 북한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당신은 종북?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당신은 혹시 좌빨?

정부와 해군은 수시로 말을 바꾸며 무조건 북한 탓으로 몰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처럼 거짓말을 반복하고 들통나면 어설프게 수습하느라 바빴다. 서해에 살지 않는 조개가 어뢰 속에 들어가 있어도, 녹이 심하게 슬고 낡아빠진 어뢰에 적힌 생생한 ‘1번’이 희한해 보여도 국민은 ‘당연히 북의 소행’이라고 믿어야 한다. 영화는 이러한 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조금 더 확실한 결론을 원했던 관객이라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꽤 얌전한 영화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언급하며 시작하고 역시 그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며 마무리하는 이 영화는 사건의 진실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질문 자체가 불가능한 소통불능의 사회를 비판한다. 믿을 수 있는 근거보다 믿을 수 없는 이유가 더 많지만 무조건 믿으라는 폭력 속에서 질문과 의심은 종북세력의 선동으로 몰린다. 반공정신이 튀어나오면 더 이상 대화는 가능하지 않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고 질문하면 종북이다.

해방 이후 친일세력이 ‘우파 노릇’을 하기 위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모두 싸잡아 ‘위험한 좌익 사범’으로 만들었다. 애국심 가득한 보수-우파의 가면을 쓴 친일세력은 반공을 빌미로 삼아 기득권을 유지했다. 남한 현대사의 안타까움이다. 반공을 앞세워 군사독재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구축한 힘을 유지하려면 천안함 사건은 무조건 북한 소행이어야 한다. 이의 제기하면 빨갱이.

박완서의 산문 ‘구형예찬’을 보면 1950년 6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너도나도 붉은 리본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밀짚모자에도, 자전거에도, 와이셔츠에도 붉은 리본을 달아 ‘나도 빨갱이다’라는 표시를 했던 것이다. 인민군이 물러간 후, 이번에는 빨갱이로 몰릴까 봐 너도나도 ‘남을 빨갱이로’ 만들어야 했다. 빨갱이의 정체란 이토록 덧없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1.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사설] 탄핵심판에서 내란죄 제외, 전혀 논쟁할 일 아니다 2.

[사설] 탄핵심판에서 내란죄 제외, 전혀 논쟁할 일 아니다

[사설] ‘법 위의 윤석열’ 응원한다며 관저 달려간 국힘 의원들 3.

[사설] ‘법 위의 윤석열’ 응원한다며 관저 달려간 국힘 의원들

경호처를 대통령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권태호 칼럼] 4.

경호처를 대통령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권태호 칼럼]

‘개같이 뛰고 있다’…쿠팡은, 국가는 무얼 했나 [6411의 목소리] 5.

‘개같이 뛰고 있다’…쿠팡은, 국가는 무얼 했나 [6411의 목소리]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