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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냉정한 눈으로 세계를 / 김규원

등록 2013-10-13 19:12수정 2013-10-13 20:52

김규원 통일외교팀장
김규원 통일외교팀장
북방한계선과 대통령 기록물을 둘러싼 모든 논란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 그가 뒷일에 대한 선견 없이 정적에 대한 과도한 선의와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신뢰, 역사에 대한 과도한 낙관을 갖고 정치를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앞으로 누구든지 그와 같은 생각으로 정치를 하면 뒷날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은 후임자가 참고할 수 있도록 남북정상회담 기록물을 국가정보원에 남기지 말았어야 한다. 그는 전임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뒤 국가정보원에 남긴 기록물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후임자는 노무현이 아니라, 이명박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의 기록도 날것 그대로 남기지 말았어야 한다. 녹음파일은 당연히 남기지 말았어야 하고, 반드시 편집된 것만 남겼어야 했다. 기록도 속기록 형태로 남겨서는 안 됐고, 역시 편집된 것만 남겼어야 한다. 모든 중요한 기록은 15~30년 동안 후임자를 포함해 아무도 볼 수 없도록 지정 기록물로만 남겼어야 한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임기 중의 모든 기록을 역사에 남기겠다는 꿈도 꾸지 말았어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해 그 이전의 모든 대통령은 임기 중의 기록을 극히 일부만 남겨놓았고, 대통령기록물법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도 만들지 않았다. 다른 대통령들처럼 중요한 기록들을 아예 남기지 말았거나, 퇴임 전에 없애버렸거나, 퇴임 때 이삿짐에 실어 집으로 가져가버렸어야 한다. 후임자가 그 기록물을 들여다봄으로써 생길 위험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북방한계선과 같은, 남북 간의 고질적인 갈등을 풀려고 한 것도 잘못이었다. 서해상의 공동어로구역과 같은, 남북 모두에 경제적 이익이 되고 평화에도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는 내지 말았어야 한다. 북방한계선은 국제법적인 근거가 미약한 것이지만 한국에서 그것을 개선하는 일은 인화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시도하면 분단 체제에 기생해온 남한의 수구파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빨갱이’ ‘종북’이라고 비난한다.

또 서해에서 남북 간에 전투가 벌어지건, 그런 전투에서 우리 젊은 장병들이 희생되건 개의치 말고 서해에서의 긴장과 갈등을 유지했어야 한다. 그것이 “북방한계선을 포기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최대 실수는 새누리당(한나라당)이 집권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집권해도 그동안 발전한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관계가 쉽사리 뒷걸음질하지 못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는 개나 줘야 했다.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군 등 국가 폭력기구들이 민주화되고 중립화됐다고 믿은 것도 잘못이었다. 그들은 천성이 수구파이자 주구파이기 때문이다.

그 폭력기구들은 언제든 권위주의 시절로 돌아가 친북 조직 사건을 만들어내고 선거와 정치에 개입할 수 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전직 대통령을 짓밟아 현직 대통령의 권력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후임자가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기적처럼 당선되지 않았다면 평생 이런 폭력기구들에 고통당한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또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 것인가.

부디 민주·진보 진영의 다음 대통령들은 노 전 대통령처럼 인간의 선의를 믿고 정치하지 말기를 바란다. 체 게바라처럼 “불가능한 꿈을” 꾸지 말길 바란다. 마오쩌둥처럼 “냉정한 눈으로 세계를” 보길 바란다.

김규원 통일외교팀장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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