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창작과비평사, 1988 글을 잘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으라고들 하는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니고 괴롭기만 하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모르겠으나 못 쓰는 방법은 안다. 일종의 ‘눈 버리기’다. 삶에 자극과 도전을 주면서 기가 막힌 표현에, 정치적으로 치열한 글을 주로 읽으면 된다. 그러면 눈만 높아져서 내 글은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내가 하도 몸부림치니 친구가 말한다. “그냥 독자로 살아.” 내 직업 중 하나는 글쓰기 강사인데,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보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이상하게) 쓸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더 많이 받는다. 이 역시 스트레스지만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작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글쓰기와 말하기는 자신을 재현하는 것, 인생의 전부다. 이태준의 1939년작 <문장강화>는 반복해서 읽기 즐거운 실속 있는 책이다. 해제의 훌륭함도 감안해야겠지만, 74년 전 책이 요즘 글쓰기 책보다 깊이 있고 세련되었다. 이태준이 동시대 인물처럼 느껴진다. 행복하다. 이 책은 “이렇게 써라”고 하기보다 좋은 글을 많이 보여준다. 우리 문장이 이렇게 풍요로웠구나, 글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한 줄 한 줄에 내 소견을 달고 싶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글의 제목은 ‘제2강 문장과 언어의 제문제’에서 박태원의 <천변풍경>에 대한 이태준의 설명에서 나오는 말이다. “…목적에 급해 토가 나올 새 없이 단어만 연달아 나오는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이나 전참후고(前參後考)할 새 없이, 돌발적이게 마음 솟는 대로 지껄이는, 아직도 소녀성이 가시지 않은, 젊은 여인의 성격이 훌륭히 보이는 말들이요… 말 자체로만 성격까지 훌륭히 드러난다”(47쪽). 한마디로,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된 좋은 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당연히 “앞뒤 생각 없이 마음대로 지껄이는”은 좋은 뜻이다. 인물의 의지, 감정,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력, 인물의 풍모를 음영(陰影)까지 묘사한다. 자유롭게 말하는 인물, 말의 밀도, 리듬을 타는 문장. 부럽다. 잠시 나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에서 생각해 본다. 위 인용문의 발화처럼 약자가 마음대로 말하는 것과 강자의 그것은 다르다. 수천 년 동안 약자는 발언의 기회도 자유도 권력도 없었다. 그러다 최근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의 목소리가 가시화되자 이들에 대해 “마음껏 지껄였던” 표현과 비유가 인권 차원에서 문제화되기 시작했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어여쁜 계집 같은 달…”(나도향, 251쪽). 이 정도는 귀여운(?) 축에 속한다. 대개 남성 지식인이 사고를 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간 누려온 줄도 모르고 맘껏 누려왔던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평소 좋게 생각했던 지식인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했을 때, 사람 보는 자기 안목을 탓하며 실망한다. 그들의 인격은 고사하고 지성이 의심스럽다. 부지런한 이들은 크고 작은 ‘규탄대회’를 열기도 한다. 얼마 전 어떤 남성이 ‘창녀’, ‘여신’이라는 비유를 써서 문제가 되었다. 이 말의 의미를 아는 남성이 얼마나 될까. 이 정도는 ‘가벼운’ 사건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나도 장애인 비하와 서울 중심적 표현을 써서 지적받고 사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여성, 장애인, 흑인이 아닌데다 ‘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기존 언어의 앞잡이, 무지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친구가 “너는 죽어도 내 고통을 모를 것”이라 했을 때 상처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할 때, ‘걸어 다니는 재앙’이 따로 없다.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그나마 대안은 24시간 긴장, 타인에 대한 존중, 말 줄이고 경청, 자기 몸을 작게 하기, 중단 없는 주제 파악… 나부터. 여성학 강사
창작과비평사, 1988 글을 잘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으라고들 하는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니고 괴롭기만 하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모르겠으나 못 쓰는 방법은 안다. 일종의 ‘눈 버리기’다. 삶에 자극과 도전을 주면서 기가 막힌 표현에, 정치적으로 치열한 글을 주로 읽으면 된다. 그러면 눈만 높아져서 내 글은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내가 하도 몸부림치니 친구가 말한다. “그냥 독자로 살아.” 내 직업 중 하나는 글쓰기 강사인데,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보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이상하게) 쓸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더 많이 받는다. 이 역시 스트레스지만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작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글쓰기와 말하기는 자신을 재현하는 것, 인생의 전부다. 이태준의 1939년작 <문장강화>는 반복해서 읽기 즐거운 실속 있는 책이다. 해제의 훌륭함도 감안해야겠지만, 74년 전 책이 요즘 글쓰기 책보다 깊이 있고 세련되었다. 이태준이 동시대 인물처럼 느껴진다. 행복하다. 이 책은 “이렇게 써라”고 하기보다 좋은 글을 많이 보여준다. 우리 문장이 이렇게 풍요로웠구나, 글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한 줄 한 줄에 내 소견을 달고 싶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글의 제목은 ‘제2강 문장과 언어의 제문제’에서 박태원의 <천변풍경>에 대한 이태준의 설명에서 나오는 말이다. “…목적에 급해 토가 나올 새 없이 단어만 연달아 나오는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이나 전참후고(前參後考)할 새 없이, 돌발적이게 마음 솟는 대로 지껄이는, 아직도 소녀성이 가시지 않은, 젊은 여인의 성격이 훌륭히 보이는 말들이요… 말 자체로만 성격까지 훌륭히 드러난다”(47쪽). 한마디로,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된 좋은 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당연히 “앞뒤 생각 없이 마음대로 지껄이는”은 좋은 뜻이다. 인물의 의지, 감정,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력, 인물의 풍모를 음영(陰影)까지 묘사한다. 자유롭게 말하는 인물, 말의 밀도, 리듬을 타는 문장. 부럽다. 잠시 나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에서 생각해 본다. 위 인용문의 발화처럼 약자가 마음대로 말하는 것과 강자의 그것은 다르다. 수천 년 동안 약자는 발언의 기회도 자유도 권력도 없었다. 그러다 최근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의 목소리가 가시화되자 이들에 대해 “마음껏 지껄였던” 표현과 비유가 인권 차원에서 문제화되기 시작했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어여쁜 계집 같은 달…”(나도향, 251쪽). 이 정도는 귀여운(?) 축에 속한다. 대개 남성 지식인이 사고를 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간 누려온 줄도 모르고 맘껏 누려왔던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평소 좋게 생각했던 지식인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했을 때, 사람 보는 자기 안목을 탓하며 실망한다. 그들의 인격은 고사하고 지성이 의심스럽다. 부지런한 이들은 크고 작은 ‘규탄대회’를 열기도 한다. 얼마 전 어떤 남성이 ‘창녀’, ‘여신’이라는 비유를 써서 문제가 되었다. 이 말의 의미를 아는 남성이 얼마나 될까. 이 정도는 ‘가벼운’ 사건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나도 장애인 비하와 서울 중심적 표현을 써서 지적받고 사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여성, 장애인, 흑인이 아닌데다 ‘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기존 언어의 앞잡이, 무지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친구가 “너는 죽어도 내 고통을 모를 것”이라 했을 때 상처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할 때, ‘걸어 다니는 재앙’이 따로 없다.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그나마 대안은 24시간 긴장, 타인에 대한 존중, 말 줄이고 경청, 자기 몸을 작게 하기, 중단 없는 주제 파악… 나부터.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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