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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누구를 위한 패션인가 / 이유진

등록 2013-10-20 19:16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지난봄 서울패션위크 때다. 한국을 찾은 외국 패션계 인사에게 한복 소개 책자를 선물하고 싶어 대형 서점에 들렀지만 단 한 권도 찾을 수 없었다. 한국 문화를 다룬 영어책 진열대엔 한식 요리법 서적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영부인 프로젝트’로 진행한 한식 세계화 사업의 파급력을 실감했다.

이번 정부는 음식보다 패션에 관심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의 ‘한복 사랑’을 보고 깜짝 놀란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나선 것이 한 예다. 지난 17일 문체부는 한복의 날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고 변형 한복 패션쇼도 선보였다. 그동안 권력을 쥔 보수층이 우리 옷의 창의적인 계승에 대해 “운동권들이나 입는 옷”이라며 외면해온 것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변화다. 하지만 회의적인 목소리도 적잖다. 한복진흥법안 관련 논의를 보면, 학생들 교복으로 한복을 장려하고 수출까지 하겠다는 야심찬 세계화 전략이 나온다. 허투루 써버린 한식 세계화 사업 예산 1000억여원이 떠올라 불길하다는 얘기가 많다.

그동안 한복을 비롯해, 다양한 옷차림을 선보인 대통령 덕분에 패션계는 모처럼 희망에 부풀었다. 물론 처음엔 ‘색깔 외교’니 ‘한복 외교’니 하는 얘기가 흥미로웠지만 이제는 지나친 ‘패셔니스타 여성 대통령 만들기’에 신물이 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긍정적이었던 건, 침체된 국내 패션계가 성장세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정작 요즘 들어 패션계는 혼란스럽다. 우려할 만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비슷한 시기에 패션행사를 따로 연 탓이다. 서울시가 18일부터 23일까지 여의도에서 진행중인 서울패션위크는 10년 넘게 매년 봄가을 열어온 패션계 최대 행사다. 말도 탈도 많았지만 역사성 덕분에 외국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하지만 관련 서울시 예산은 지난해 연간 2회 38억원에서 올해 31억원으로 20% 가까이 줄었다.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은 한푼도 없다.

그 대신 문체부는 17일부터 19일까지 강남에서 따로 제1회 ‘패션코드’를 열었다.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유망 브랜드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서울패션위크와 비슷하다. 기간이 겹친 탓에 디자이너와 바이어들은 분산됐고, 패션계 안에서도 예산 낭비라는 비판이 터져나온다. 이번 패션코드 행사 예산은 총 11억원으로, 서울패션위크 예산 삭감분 7억원보다 많다.

해당 부처는 “패션코드가 페어(업무 상담) 중심이라 쇼 중심의 서울시 행사와 성격이 다르다”고 하지만 두곳 다 ‘페어’와 ‘쇼’는 물론이고, 시민 참여행사를 마련한 것까지 비슷하다. 각자의 행사로 돈 낭비만 했다며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상생 효과를 바랐다지만, 서울시와 문체부 사이에 사전 교감은 충분히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바쁜 외국 바이어들이 여의도와 강남의 두 행사를 오가리라 기대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새 정부 들어서며 패션 사업에 한층 박차를 가하고 있는 부처가 ‘딴살림’을 차린 것으로밖에 풀이되지 않는다.

이런 혼란 탓에 한 디자이너는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정부가 훼방이나 놓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패션계는 여기저기 정부 돈이 풀릴 예정이니 신이 날 법도 한데, 냉소적인 분위기가 뚜렷하다. 가장 큰 우려는 지금의 패션정책이 사업타당성에 대한 정확한 검토 없이 대통령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부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대로라면 패션 진흥 사업도 한식 세계화 사업처럼 실익 없이 세금 낭비만 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며 업계엔 한숨이 늘고 있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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