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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예외의 원칙 / 민규동

등록 2013-10-23 18:55

민규동 영화감독
민규동 영화감독
아파트 현관 입구 경비실 바로 앞에는 휠체어 마크가 그려진 장애인 전용 주차장이 3개 나란히 마련되어 있다. 지하든 지상이든 늘 주차 공간이 모자라고 주차장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아파트이기에, 특히 무거운 짐이라도 있어 지하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헉헉대며 올라오는 날엔 텅 비어 있는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을 침범하고 싶은 욕망에 침을 꼴깍 삼키게 된다. 밤새 비어 있을 그 자리를 생각해보면, 여기저기 헤매다 지하 3층까지 내려가느라 쓴 기름도 시간도 아까워지는 것이다.

난 꽤 고지식한 편이라 이런 순간을 맞닥뜨릴 땐 도를 닦는 심정으로 원칙적으로 대처한다. 그 작은 승부에서 한 끗이라도 밀리면 아무리 내공을 쌓아둔 개똥철학이라도 도미노처럼 무너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유혹들이 종종 훅 터져나와 평정심의 면역체계를 흐트러뜨린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오줌보가 터질 듯한 순간에 겨우 휴게소에 도착해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연휴라 길게 줄이 늘어서 있을 때, 비어 있는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 눈에 들어온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막 출산이 임박한 아내를 태워 병원에 도착했는데, 주차장이 꽉 차 있어서 다시 병원 밖으로 나가 주차장을 찾아야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길 건너 빌딩에서의 최종 면접 시간이 임박한 순간에 빨간불에 막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양옆을 돌아봐도 차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냥 효율을 따져 계산해 보면, 일단 빈 화장실을 일시 점거했다가 바로 자리를 비워주면 되고, 일단 보도 위에라도 주차하고 산모를 챙기고, 또 그냥 재빨리 무단횡단 하고 약속을 지키는 편이 낫다. 타인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대신 그때 챙긴 소중한 편의의 몇 분을 더해 내 인생이 좀더 고양되고, 그 결과가 결국 세상을 위해 복무할 나비효과를 떠올려볼 때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관습적인 이성은 사안의 경중을 따져 원칙의 적절한 예외를 인정한다. 문제는 이 예외를 판단하는 주체가 공공의 합의가 아니라 저마다의 절박한 사정으로 무장한 개인 자신이 되어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순간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타인의 삶과 미세할지라도 상당히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른바 그 나비효과는 긍정과 부정의 양극단을 다 품고 있는 무서운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화장실을 차지한 짧은 순간에 더 시급한 중증장애인이 등장한다면, 출산 중에 병원에 불이 나지만 소방도로를 막은 차 탓에 화재 진압이 늦어진다면, 또 횡단 중에 급하게 돌아 나온 차와 부딪치는 사고로 운전자가 죽는다면, 애초에 취한 적절한 기준이 과연 합리적인 거라 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원칙의 수혜자와 예외의 수혜자가 본질적으로 상충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될 때, 과연 모두를 위한 예외의 원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질문하게 된다. 난 예외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그 빈틈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삼는 것’ 외엔 답을 모른다.

반대로 원칙을 경직됨으로 평가절하하며 그 빈틈마다 본인의 상대적 기준을 들이미는 순간, 유연함의 이름으로 포장된 예외의 남발을 막을 길이 없다. 그건 초등학교 간부 시절 학급비로 콜라를 몰래 사먹고, 커서 공직에 올라 권력을 유용하는 순간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무한한 폐해를 양산한다.

올해 내내 나라에 들끓는 논쟁은 일견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미 신뢰를 잃은 지 오래인 검찰이건만, 요사이 그저 원칙적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자들이 사뭇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기이한 풍경들이다.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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