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1년 전 스페인을 여행하다 캐나다와 독일에서 온 백인 청년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캐나다 청년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한국에서 1년 동안 살았다”며 반가워했다. 그는 “한국은 너무 친절한 나라다. 또 갈 거다”라고 했다. 캐나다 청년이 없는 자리에서, 독일 청년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아까 캐나다 애가 ‘한국은 천국’이래. 자기가 길거리를 지나가면 여자애들이 와서 ‘참 잘생겼다. 얘기 좀 하자’고 한다더라. 진짜 그래?” 나는 피식 웃었다. “설마! 그냥 너를 놀리는 거야.” 말도 안 된다고 자르면서도, 나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한국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대부분 ‘하얀 피부’를 좋아하긴 해.’
갑자기 이 일화가 떠오른 건 최근 마약 단속을 벌이던 그리스 경찰이 집시촌을 덮쳤다가 푸른 눈의 금발 소녀를 발견하곤 친부모 찾기에 나섰다는 기사를 접하고 나서다. 집시들이 아이들을 유괴해 구걸을 시키는 사례가 있다고 들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경우겠지 했다. 그러나 기사들을 읽다 보니 반감이 일기 시작했는데, 서구 언론들이 ‘마리아’라는 이 소녀를 ‘블론드 에인절’(금발의 천사)이라고 부르며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함께 살았던 집시 부부와 그들의 이웃들은 마리아를 납치한 게 아니라 생모가 기를 수 없어 맡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경찰과 언론은 ‘비공식적 입양’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들에게 집시라는 족속은 아이를 납치해 구걸과 성범죄에 이용하는 ‘검은 악마 집단’이었다.
과연 금발 머리, 푸른 눈은 집시에게선 태어날 수 없는가? 어릴 적 봤던 영화 <슬픔은 그대 가슴에>에선 흑인 엄마에게서 백인 같은 딸이 태어나기도 하던데. 며칠 뒤 이 ‘금발 천사’의 친부모가 검은 피부를 지닌 또 다른 집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친부모의 신원이 드러나기 전, 필립 보레보라고 하는 18살짜리 블로거는 영국 <가디언>에 ‘나는 하얀 집시’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부모님은 나를 훔쳐 왔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마리아 사건’을 보니 이젠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다”라고 썼다. 보레보의 어머니는 불가리아 집시와 영국 집시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영국 집시와 아일랜드인의 피가 섞였다. 보레보의 형들은 짙은 피부, 검은 눈을 지녔지만 보레보는 옅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 그의 동생은 완벽한 금발로 태어났다.
최근 우리말로 옮겨진 책 <푸른 눈, 갈색 눈>(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에선 뿌리 깊은 편견을 교육으로 극복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마틴 루서 킹이 암살된 1968년 4월4일, 미국 아이오와의 초등학교 교사인 제인 엘리엇은 ‘차별 수업’을 시도하기로 마음먹는다. 학생들이 모두 백인이었기 때문에 엘리엇은 아이들을 푸른 눈동자와 갈색 눈동자로 나눈 뒤 ‘푸른 눈이 우월한 날’, ‘갈색 눈이 우월한 날’을 정한다. 푸른 눈이 우월한 날엔 갈색 눈을 차별했다. 푸른 눈이 잘못하면 그냥 넘어갔지만, 갈색 눈이 실수하면 “너는 갈색 눈이라 그런 거야”라며 매섭게 호통쳤다. 아이들은 애초 차별 수업의 규칙에 동의했음에도, 정작 실험이 계속되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차별하는 쪽과 차별받는 쪽 모두를 경험하는 가혹한 이 게임을 통해 아이들은 차별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지를 깨닫는다.
금발이라서 살기 편한 이들에게, 금발이 아니라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리고 시치미를 떼도 속으론 금발을 편애하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 수(Sioux)족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오 위대한 영이여, 내가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걷기 전에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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