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칼럼니스트
“아메리카노 두 잔 나오셨습니다”에 관한 농담이 유행한 적이 있다. 손님이 아닌 커피에 존대하는 셈이니 틀린 표현이지만 사실관계를 따지면 올바른 어법이라는 주장이다. 커피 한 잔 가격이 알바의 시급보다 비싸니까 ‘지체 높으신 커피님’에게 존대하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는 것. 씁쓸한 이야기다. 그러나 가격과 상관없이 물건을 존대하는 어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점원들의 무지를 비웃거나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카페에서 알바생에게 잘못된 높임말을 지적하며 큰 소리로 면박을 주는 손님을 본 적도 있다. 올바른 말을 쓰면 좋겠지만 굳이 저걸 계몽하려는 것도 일종의 ‘갑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높임말이 사라지지 않는 걸 두고 점원의 무지만 탓할 수 있을까? 혹시 여기엔 사회적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의 노동 현장에서는 굴종에 가까운 접객 태도가 ‘친절한 서비스’와 거의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고객님’의 기분을 매 순간 살피는 가운데 ‘고객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고객님’의 최종 선택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안목의 결과임을 경탄 어린 목소리로 보증해줄 수 있을 때, 노동자는 비로소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게 된다. 오히려 점원이 사람과 사물을 칼같이 분리해 올바른 높임말을 사용할 경우 매니저나 일부 손님에게 ‘예의 없다’고 비난받을 가능성이 높다. 상품과 서비스에 문제가 없는데도 트집을 잡는 ‘악의적 소비자’들로 넘쳐나는 이 살벌한 정글에서 ‘바른말 고운말’을 따지는 건 사치스러워 보일 정도다.
얼마 전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 수리기사인 최종범씨가 자살했다. 지난 7월 고객 불만이 접수됐고 이후 최씨는 지사 사장에게 욕설과 인격모독에 시달렸다. 고객은 최씨가 ‘짝다리를 짚었다’며 시비를 걸었다고 알려졌다. 고객과 면대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직업들 다수가 소위 ‘감정노동’이고 서비스센터 기사 역시 엔지니어이면서 감정노동자다. 감정노동은 점점 더 중요한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다. 서비스노동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커지면서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술을 내면화하도록 강요당한다.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승무원에게 라면을 끓여 달라는 등 행패를 부려 ‘전국구 진상’으로 거듭난 왕아무개씨 사건도 전형적인 감정노동 이슈였다. 그런데 ‘악의적 소비자’에 대한 공감과 공분은 급속히 확산된 반면, 노동자를 보호할 제도적 장치들은 거의 무시되어왔다. 몇몇 기업이 ‘진상고객 대응 매뉴얼’ 같은 걸 만들었지만 그것은 이미 극단적인 문제가 발생한 다음의 처방일 뿐 대안이라 할 수 없다. ‘진상고객’의 행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출 경우 사태는 소비자 개인의 소양 문제로 협소해지고 만다.
문제의 핵심은 일하는 사람의 신경을 죽음에 이를 때까지 소진시키는 한국 사회의 노동환경이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이 앞장서서 흐름을 주도해왔음은 물론이다. 최종범씨를 자살로 내몬 근본적인 이유는 한 건의 고객 불만이 아니라 삼성의 노무관리 방식이다. 그들은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뿐 아니라 법적으로 보장된 조합 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하고 심지어 협박까지 일삼았다. 최종범씨 역시 노조활동을 이유로 표적감사 대상이 된 경우였다. 엄연한 인권침해이지만 그들은 전혀 사과하지 않고 반성하지도 않는다. 되레 ‘고객만족’이니 ‘고객감동’이니 하는 말로 치장한다. 우리는 몇몇 ‘진상고객’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여론재판을 열지만 정작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는 기업한텐 지나치게 관대하다. 진상 규명이 절실하다. 누가 진짜 ‘진상’인가?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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