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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부정선거의 추억 / 권혁철

등록 2013-11-05 19:09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아침 6시에 일어나 점호에 참가하러 연병장으로 나오면 물안개가 눈과 코에 스며들었다. 새벽녘 피어난 안개는 가을과 겨울에 더욱 자욱했다. 불과 4~5m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을 터벅터벅 걸어가노라면 이 안개 속에 영원히 숨고 싶은 기분이 들곤했다. 아침점호 때마다 잠긴 목소리로 ‘복무신조’를 외쳤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20여년 전 나는 대한민국 육군이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외웠던 복무신조처럼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진 못했다. 당시 대한민국 군인은 노태우 정권에 충성을 다해야 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매년 3~5월 시위진압 훈련을 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진압봉으로 대형을 갖추어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는 훈련을 했다. 당시 훈련했던 설대대형은 아직도 기억난다. 설대대형은 시위 군중을 향해 병력을 쐐기 모양으로 정렬한 뒤 시위 군중을 향해 돌진해 군중을 해산시키는 대형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호에 맞춰 나무 몽둥이를 치켜들고 흙먼지가 누렇게 이는 연병장을 종단횡단했다.

군 복무 중 치른 몇차례 선거는 한마디로 부정선거였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서는 선거가 다가오면 대대장이 전 병력을 연병장에 모아놓고 ‘무엇보다 안정이 중요하다. 여당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훈시했다. 야당 후보를 찍을 것으로 예상되는 병사는 소대장, 중대장 등에게 불려가 개별 면담을 했다. 투표날이 다가오면 소대별로 회식비가 내려왔다. 병사들은 평일 일과시간에 트럭을 타고 남한강변으로 가서 대낮 막걸리파티를 열었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는 격오지 파견근무자가 많았다. 이들의 부재자 투표용지는 당사자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간부들이 멋대로 여당 후보한테 투표했다. 당시 군 부재자는 부대 안에서 투표했다. 병사들이 기표소에서 나오면 ‘투표용지에 기표한 도장이 번지면 안 된다’고 간부가 투표용지를 대신 접어 투표함에 넣으면서 병사들이 여당 후보를 찍었는지 확인했다. 당시 이런 부정선거는 전국 부대 곳곳에서 벌어졌다. 당시 나는 용기가 없어 이런 부정선거에 저항하지도 고발하지도 못했다. 1992년 군 부재자투표 부정 사실을 폭로한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 이후 군인들의 부재자 투표소가 영내에서 영외로 바뀌면서 노골적인 부정선거는 사라졌다.

나는 문민정부 이후 군의 정치 개입은 사라졌다고 믿고 있다. 요즘은 정국이나 시국이 혼란해도 계엄령이나 위수령 발동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군 고위 지휘관들도 예전의 ‘정치군인’에서 ‘안보전문가’로 이미지 쇄신을 했다. 다들 군인이 정치를 주무르는 끔찍한 시대는 흘러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국군 사이버사령부 요원이 인터넷 게시글 등을 통해 대선에 개입한 정황은 이런 믿음을 흔들고 있다. 군 사이버사령부 요원의 대선 개입은 한 점의 의혹도 남김없이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 그런데도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군 사이버사령부의 구실에 “오염 방지를 위한 대내 심리전도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의 선거개입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군이 선거에 개입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 이게 민주국가의 상식이고 원칙이다. 복무신조를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20여년 전과 내용이 같았다. 대한민국 군인은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이와 달리 용병은 특정 개인이나 정파에 충성한다. 용병으로 스스로 전락하느냐 군인으로 남느냐. 군 대선 개입 의혹 진상 규명은 대한민국 군인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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