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만종’과 농촌의 소외 / 이라영

등록 2013-11-06 19:19

이라영 집필노동자
이라영 집필노동자
창조경제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창조과학보다 더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두고 창조경제의 대표 사례라고 했지만 여전히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제는 제2의 새마을운동까지 한다니 무엇을 창조하고자 함인지 갈수록 난해하다. 청와대 블로그를 보니 이 창조경제의 영감을 얻기 위해 대통령은 박물관을 꼭 다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다. 그래서 이번 유럽 방문 중에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관람하였고 특히 밀레의 <만종>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고 한다.

<이삭줍기>와 함께 밀레의 <만종>은 너무도 유명하여 ‘이발소 그림’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발소 그림이란 이발소에 하나쯤은 걸려 있을 정도로 흔한 복제 그림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지만 미술관에 갈 기회가 없는 서민들의 정서에 친숙한 그림들이기도 하다. 일하는 농민을 주로 그린 밀레의 작품이 그리 복제물이 많고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 박 대통령이 밀레의 작품 앞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고, 그래서 어떤 ‘창조적’ 영감을 얻었을지 궁금하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이후 농민의 정치 참여도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산업화 속에서 파리가 화려하게 근대 도시로 변모하는 동안 농민은 더욱 밀려나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빈곤계층이 되어갈 뿐이었다. 밀레는 산업사회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소수의 부르주아가 아니라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농민의 고된 삶을 집요하게 붓으로 기록하며 소외자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명작으로 남은 <만종>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배고프고 쓸쓸한 젊은 소작농의 슬픔을 담은 그림이다.

대통령은 밀레의 그림 속에서 이러한 노동계급의 소외와 빈곤을 읽었을까. 그는 문화가 상대 국가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비참함도 외면하는 마당에 19세기 그림 속의 프랑스 농촌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이해하고, 또 ‘창조경제의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밀양에서 농부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령의 주민들이 대통령을 향해 그토록 들어달라고, 보아달라고 호소하지만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 속에서 765킬로볼트 송전탑은 안하무인으로 농촌의 삶을 짓밟으려 한다. 농촌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경제발전이야말로 조금도 창조적이지 않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을 위해서 농촌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생활양식을 잃어야 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로 농민들을 꼬드겼지만 그 ‘우리’ 속에 농민은 포함되지 못했다.

밀양 송전탑 건립 반대를 두고 한쪽에서는 님비현상이라며 비난하고 밀양 주민들을 마치 지역이기주의자인 양 몰아간다. 그런데 전기를 주로 소비하는 곳은 도시다.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을 위하여 농촌에 당당히 희생을 강요한다면 대체 누가 이기적인가. 이에 대해 민주적 절차는 고사하고 공권력을 투입하며 70대, 80대 주민들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헬렌 켈러는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글의 말미에서 ‘듣지 못하게 만드는 산업 폭군’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한다. 마지막 문장이 “산업적 시각장애와 사회적 청각장애”로 끝난다. 자신이 만약 책을 쓴다면 지어질 제목이라고 했다. 물론 헬렌 켈러만이 쓸 수 있는 제목이다. 눈이 보이고 귀가 들려도 민중의 삶을 보지도 듣지도 않는 이 현실에서 이 제목은 아직도 유효하다. 실체도 알 수 없는 창조경제를 설파하기 전에 밀양을 비롯하여 성장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소외계층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1.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경호처를 대통령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권태호 칼럼] 2.

경호처를 대통령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권태호 칼럼]

[사설] 탄핵심판에서 내란죄 제외, 전혀 논쟁할 일 아니다 3.

[사설] 탄핵심판에서 내란죄 제외, 전혀 논쟁할 일 아니다

[사설] ‘법 위의 윤석열’ 응원한다며 관저 달려간 국힘 의원들 4.

[사설] ‘법 위의 윤석열’ 응원한다며 관저 달려간 국힘 의원들

‘개같이 뛰고 있다’…쿠팡은, 국가는 무얼 했나 [6411의 목소리] 5.

‘개같이 뛰고 있다’…쿠팡은, 국가는 무얼 했나 [6411의 목소리]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