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알리 러셀 혹실드 지음, 백영미 옮김, 아침이슬, 2001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알리 러셀 혹실드 지음, 백영미 옮김, 아침이슬, 2001
새벽 1시. 전화벨이 울렸다. 밤잠 없으신 아버지인 줄 알고 받았는데 “큰 실례라는 것을 안다, 죄송하다”는 잘 모르는 이의 전화였다. 핸드폰을 안 쓰는 대신 집 전화번호를 남발한 탓이다. 나도 가끔 이런 전화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라, 우주에 돌고 도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성의를 다해 경청했다. 실은 내가 이런 전화를 했을 때 상대방 기분은 어떨까를 경험함으로써,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기 위한 이유가 더 컸다.
그의 요지는 소위 기러기 아빠의 고독. “집에 오면 아무도 없는 컴컴한 방에 들어가 고단한 몸을 누이는데, 아무리 재충전을 해도 속일 수 없는 세월의 피로와 외로움의 연속인 삶”이라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삭이기 힘든 이견이 생각났다. 그에게 메일을 썼다. “선생님은 퇴근 후 집에 가족이 있으면 덜 외로운가요? 저는 그 반대거든요. 저처럼 ‘아내’가 없는 사람은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갈 때 누군가 있는 것이 완전 공포거든요. 녹초가 된 몸으로 또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여관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에요. 제겐 가족이 외로움을 덜어준다기보다 일거리예요. 저는 혼자 있을 때 안 외로워요.”
남성에게 집은 쉼터지만 여성에게는 노동의 공간이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규범이다. 그래서 남성은 혼자일 때 더 외롭고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은 독립, 자립, 씩씩함 같은 ‘우월한’ 남성성에 대한 통념과 다르게, 실제로는 같이 놀아줄 이성을 필요로 한다. 여주인이 ‘호스테스’로 둔갑하고 ‘위안부’, ‘접대부’는 남성 문화를 상징한다.
얼마 전 ‘좋은 마을 만들기’ 프로그램에 강의를 갔다. 거기서 만난 전직 직장여성은 뼈 있는 농담으로 “회사일, 집안일, 노조 대의원에 이제 마을 활동까지 하라고 해서 아예 직장을 그만뒀어요”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 일과 육아, 가사를 병행하는 여성은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걸린 게 아니라 실제로 울트라 슈퍼우먼이다.
여성 상위?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이 아니라 역할(노동량)이 많아진 것이다. 100% 주부로만 사는 전업주부도 없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이들도 재테크부터 인형에 단추 달기까지 부업을 하거나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남성의 가사 노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여성의 취업은 평등이 아니라 이중노동이다.
이 책은 내가 많이 권하는 책 중 하나다. 감정노동(emotional labour) 개념으로 유명한 저자가 부부 50쌍을 인터뷰하고 일부는 같이 생활하면서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을 분석한 책이다. 기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새로운 이론을 주조하는 질적 방법의 모범으로도 유명한 책이다. 학술적이면서도 삶의 이면이 켜켜이 세밀하다.
번역은 훌륭하다. 역시 제목이 문제다. 덕분에 책을 권할 때마다 긴 설명을 해야 한다. 이 책에 돈 버는 여자는 나와도, 밥하는 남자는 안 나온다. 원제는 ‘2교대’(The Second Shift). 여성은 직장 업무를 마치고 집에 와서 전임 교대자 없는 근무를 또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압축적이고 지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번역서 제목은 ‘화성 남자, 금성 여자’ 식으로 현실을 왜곡한다. 성별은 노동과 자본, 흑인과 백인과의 관계와 같다. 적대적 모순이지 ‘짝꿍’이나 대칭 관계가 아니다. 이런 제목 때문에 여성주의가 남녀 대항으로 오해받는 것이다.
사례 중 압권. 남편과 싸우다가 기진맥진한 아내는 결국 평등한 ‘분담’에 합의한다. 아내는 위층(거실, 식당, 주방, 침실 두 개, 욕실 두 개)을 맡고, 남편은 아래층(창고와 차고)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75쪽, ‘슈퍼우먼 신화로 도망친 페미니스트’) 남성이 여성만큼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한, 그 노동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류의 모든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사족: 이런 글을 쓰면 꼭 “나는 안 그렇다”는, 인정 욕구인지 자랑인지 항의인지 모를 남성의 편지를 받는다. 나는 이렇게 답장을 한다. “반갑습니다. 다른 남성들도 선생님처럼 변화시켜주세요.”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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