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장위동에 살던 무렵의 일이다. 지하철을 타고 직장에 다녔는데 집에서 역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우리 집과 역 사이에는 둘러가지 않는 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골목길이 있었다. 야산과 집들의 담벼락 사이로 난 길은, 밝을 때 보면 제법 운치가 있다. 문제는 해가 지고 나서였다. 퇴근이 늦어 발걸음을 서두르던 어느 날, 예의 골목길 초입에 들어섰을 때 이미 내 앞에서 집으로 향하는 듯한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발소리를 확인한 그 여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아까와는 달리 부리나케 가는 게 아닌가. 하이힐 소리가 널을 뛰었다. 그다지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비슷한 상황은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앞선 이가 골목을 빠져나가길 기다리거나 둘러 가기도 했지만 번번이 그러기도 마땅치 않았다. 불편은 내가 이사를 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나는 정문을 나서면 코앞에 지하철역이 있는 마포의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출입카드 없이는 단지를 출입하기가 어려운 곳이다. 내가 사는 곳은 9층이었는데 이사하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다. 9층까지 계단으로 올라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게 의외로 쉽지 않다. 한달음에 오르면 숨이 턱까지 찬다. 나름대로는 틈새 시간 활용이라 여기며 뿌듯해했다. 하지만 그 뿌듯함도 며칠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반투명한 유리로 된 단지의 현관 앞에 섰을 때 안쪽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나는 출입카드를 꺼내 키 박스에 갖다 댔다. 띠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려는 찰나 아이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좀처럼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아서 그러는 모양이라 여겼다. 나도 계단을 올랐다. 내가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위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들린다는 걸 알아챈 것은 3층을 지날 무렵이었다. 탁탁탁탁 하고 잠시 쉰 후에 탁탁탁탁 하고 울린다. 무슨 소리일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여 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다시 잰걸음을 놀렸을 때 틀림없이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계단과 계단 사이의 틈새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두 층 정도 위에서, 조금 전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아이가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아이의 눈에서 봤던 공포의 정도를 여기에 옮기기는 어렵다. 다만 이런 짐작은 할 수 있겠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낯선 남자와 엘리베이터를 타지 마라”는 충고를 들었으리라. 몹쓸 짓을 당했던 또래에 관한 뉴스를 봤거나, 직접 그런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사주경계라고까지 하면 지나친 표현이 되겠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았을까. 이대로 있다가는 낯선 남자인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겠구나 생각한 아이는 계단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남자가 자신을 쫓아 계단을 올라오는 게 아닌가. 아이는 재빨리 계단을 오르며 남자의 집이 3층이기를, 얼른 사라져 주기를 바랐다. 급박한 발걸음 사이의 짧은 멈춤은 아이가 내 동향을 살피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던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아이의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내가 느낀 알량한 불편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지난 19일, 보육원 아동을 폭행하고 성추행한 보육 교사에 대해 재판부가 “추행도 성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피해 아동과 더 친근해지려는 의도가 지나쳐 벌어진 범행으로 보인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던 아이가 이 뉴스를 본다면, 아이는 이제 낯선 남자는 물론이고 평소 자신에게 친근함을 표시했던 남자들에게까지 경계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폭력은 이런 식으로 지속되는 게 아닌가 싶다.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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