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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성장 불가능성 테제 / 박권일

등록 2013-12-02 19:07

박권일 칼럼니스트
박권일 칼럼니스트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세살이 되는 생일에 계단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자랄 수 없는 몸이 된다. 음란하고 비루하며 탐욕스러운 어른 중 한명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알레고리라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하지만 칼에 찔린 듯 비명을 질러대는 괴팍한 난쟁이 오스카는 독일 전후 세대의 상징이 되었고 성장소설의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로 우뚝 섰다.

성장을 거부한 소년의 이야기가 어떻게 탁월한 성장담이 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 체제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저지른 최악의 비윤리(전쟁)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찾아왔고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라 불리는 이른바 ‘전후경제’가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얼마 전의 처참한 살육과 기만을 마치 모르는 일인 양 천진난만하게 어른이 되고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시대의 공기야말로 ‘성장의 거부’를 불온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필수불가결한 배경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성장을 거부하는 일이 의미 있으려면 절대다수에게 성장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성장은 상실의 경험이다. 상실은 늘 쓰디쓰고 고통스럽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가는 경험이다. 부모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자식 역시 상대적으로 비슷한 간격과 높이의 허들을 하나씩 넘어서며 어른이 된다. 그래서 성장담은 세대를 거듭하며 변주되는 약속이다. 20세기의 성장담이 몇 세대를 거치면서도 원형이 대부분 유지된 것은 20세기적 생산양식이 개인의 성장 단계를 보증해주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료·교육 체계 속에서 생물학적 나이에 따라 나뉜 발달 단계가 제시되었고 개인의 삶은 이에 맞춰 전형화되었다. 그것이 근대 성장서사의 물적 기반이다.

지난 세기의 청년들, 특히 지적이고 예민했던 이들에게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체제’에 봉사하는 것은 치욕이고 모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저항이 혹여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을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21세기의 청년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해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공포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체제로의 편입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데서 피어오른다. 그런데 사회의 재생산 방식이 바뀌었음에도 기성세대의 기준, 다시 말해 20세기의 성장서사라는 필터를 통해 성장이 평가되기 때문에 21세기의 청년들은 영원한 ‘미숙아’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를 ‘성장 불가능성 테제’라 부를 수 있겠다.

가히 절망의 홍수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말이 유행한 지도 한참 됐다. ‘우린 망했다’는 선언을 두 시간 듣기 위해 사람들은 적지 않은 강연료까지 지불한다. ‘절망 담론’의 주된 소비자층은 ‘자기계발 장사’, ‘힐링 팔이’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다. 희망을 쉽게 내뱉는 이들이 대개 사기꾼인 건 사실이지만 “망했다”는 말을 남발하는 이들 역시 미덥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따지면 언제는 안 망한 시대였을까? 망하고 흥했다는 식의, 어떤 시대에 대한 동시대인의 ‘최종 판단’은 누가 하더라도 주제넘는 짓이다.

성장 불가능성 테제가 파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속 시원한 결론’과 차라리 극단에 서 있다고 해도 좋다. 20세기적 잣대와 21세기적 현실 사이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청년들을 향해 “노동을 기피한다”느니, “성장을 거부한다”느니 비난해봐야 서로 기분만 나빠질 뿐이다. 과거의 성장담을 들이미는 것도, 성장이 아닌 생존에만 골몰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청년세대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리듬도 전면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이제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그곳이 출발지점이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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