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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캐구·캐몽이 뭐길래 / 이유진

등록 2013-12-15 19:13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 겨울, 동네 패션이 달라졌다.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2년 전 중고생들 사이에서 ‘교복’이라 일컬어지던 ‘노스페이스’ 패딩점퍼를 입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퍼는 수십만원대의 비싼 가격 탓에 ‘등골브레이커’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지갑을 여는 학부모들이 많았다. 그 옷은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계급 상승의 도구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가 제품, 명품 소비를 둘러싼 계급화 현상은 어른·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이제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도 ‘노페’가 유행을 타는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란다. 아이들이 ‘한물간’ 점퍼를 더 이상 입지 않기 때문에 엄마들과 할머니들이 그 옷을 거꾸로 물려받아 입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웃었지만 뒷맛은 씁쓸했다.

폴란드 태생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행의 시대>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남보다 앞서 나가는 징표로서 ‘유행’을 빠르게 획득한다고 했다. 과거의 징표가 쓰레기장으로 보내지는 징후는 선명하다. 다음번엔 더 새롭고 비싼 것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올해 ‘신등골브레이커’로 등극한 브랜드가 나타났다. ‘어른들의 교복’이라 불리며 국내에서 품절 사태를 빚고 있는 ‘캐나다 구스’다. 이를 줄여 ‘캐구’라고 부른다. 다른 신조어도 있다. 비슷한 국내 제품은 ‘짭나다구스’, ‘캐나다 구스’와 또 다른 고가 패딩 브랜드인 ‘몽클레어’를 합쳐 이르면 ‘캐몽’이라고 한다.

극한의 추위를 막아준다는 ‘캐구’는 100만원을 훌쩍 넘는 고가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가 품절 사태를 빚었다.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한 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은 인터넷을 통한 할인판매를 약속했다가 현지에서 물량을 확보하지 못했다며 판매를 취소하고 쏟아지는 항의에 사과문까지 발표했다. 실물을 보려고 백화점을 찾았더니 매장엔 문의전화가 쉴 틈 없이 울리고, 판매원은 “현지에서도 여성용 물량을 확보할 수 없어 언제 수입될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명품 시장에선 한국인이 봉’이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비난과 부러움은 동전의 양면이라 보아선지, 개의치 않는 눈치다.

사실 패딩점퍼는 이번 겨울 최고의 유행 아이템이다. 전문가들은 “모피보다 싼 가격이 매력적”이라는데 이런 고가 패딩은 모피값에 육박한다. 하물며 아이들한테까지 이런 비싼 옷을 사 입히려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비슷한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지난 국가정보원의 댓글 사건 관련 자료를 보면, 당시 대통령 손녀가 입은 것으로 알려진 몽클레어 점퍼 얘기가 나온다. 국정원 직원은 “대통령 일가는 아이에게 고급 점퍼를 사 입힐 만큼 여유가 있다”며 “좋은 옷을 입히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두둔했다. 그 말이 맞을지는 몰라도 이물감이 남는다. 혹한의 추위에 아이를 내모는 것도 아닌데 그런 값비싼 점퍼를 사 입히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 선택일 수 있나 싶은 것이다. 누구나 고급·고가 시장으로 달려가기만 하는 이 시대에 또 다른 소비의 미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한 소식을 들었다. 전통을 자랑하는 어느 패션동호회 사람들이 지난주 열린 철도노조 집회에서 파업을 지지한다며 핫팩 수천개를 기증했다는 것이다. ‘패션’은 옷만이 아니라 그 시대 문화 유행의 전반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 남다른 패션의 가능성을 선보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왕 새로운 흐름이 온다면 내년엔 ‘등골브레이커’가 아닌 다른 종류의 유행을 기대해봄 직하다. 그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사는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가 되길 바란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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