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어렸을 때 무슨 설문조사 같은 데서 ‘당신의 취미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독서’라고 대답하곤 했다. ‘취미는 독서’라고 적어본 기억을 가진 사람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서가 어떻게 취미가 될 수 있냐”라는 훈계 비슷한 얘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 나는 독서를 취미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구나, 책은 늘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하는 것이니까 취미가 될 수 없는 것이구나. 인생의 큰 비밀 하나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 무렵 나는 책을 꽤 많이 읽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영웅문>도,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도, <토지>도 그때 다 읽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꼭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로 역사와 철학에 관한 책이었다. 선배들과 하는 세미나에서 나는 종종 무식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기분이 나쁘기보다 묘하게 자극이 되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떤 종류의 책들은 읽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당하던 시절이. 그때 그 책들을 읽어두어서 다행이었다고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얼마 전에 동화를 쓰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요즘 부모들은 얘들한테 동화를 권하지 않아요. 영어나 수학의 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해놓은 학습만화를 사주고 읽게 하지요.” 이왕이면 성적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게 하자는 부모의 의중을 동화작가이기도 한 초등학교 교사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섭섭하더란다. 스마트폰과 게임이 아이들의 여가시간을 석권하고 있는 마당에 학습만화라도 읽는 게 어디냐고 대답한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자신의 독서 취향을 아는 것은 필요하고 그것은 대개 성장과정에서 길러지는 법인데.
내가 이만큼이나마 책을 골라서 읽을 줄 아는 취향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시절 ‘꼭 읽어야 하는 책’을 부지런히 섭렵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꼭 읽어야 하는 책’을 어떻게든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자랐던 경험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덕분에 지금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을 읽지 말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일종의 기술이 아닐까. 물론 독서 따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기술이겠지만, 대개 인간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의외로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싶은지 잘 모르는 어른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베스트셀러에 눈이 갈 수밖에 없으리라.
베스트셀러를 몽땅 다 비하할 의도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사람들도 슬슬 깨달아 주었으면 한다. 이를테면 어느 인터넷서점에서 ‘2013 연말 총결산, 올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뽑아놓은 목록에, 사재기로 적발되어 지난 11월29일치 <한겨레>에도 보도됐던 도서가 버젓이 올라와 있는 것도 그런 경우다. 책을 사면 마일리지를 왕창 지급한다든가 영화 티켓을 준다는 식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떡하니 자리잡은 책들이 제법 많다는 것도 조금만 살펴보면 알 수 있겠다. 예전에는 화도 났는데 이제 나는 그런 걸 봐도 별 감흥이 없다. 다만 뭐라도 읽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뭘 읽어야 할지 몰라, 그나마 남들이 읽는 책이라도 따라 읽으려는 사람들을 이용해 눈 가리고 아웅 하며 한 권이라도 더 팔아보려는 출판 풍토가 완전히 정착된 게 아닌가 싶어 서글픈 기분이 들 뿐이다.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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