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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사투리 / 임범

등록 2013-12-23 19:05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니 그라나? 사귀는 여자한테 그라나? 니 첫사랑이라 카는, 그 젖통 큰 가시나한테도 그랬나? 지금맨키로 주디 찌자지도록 볼탱이 잡아땡기고 대가리 때리고 그랬나?”

<응답하라 1994>에서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동생처럼 대해온 태도를 바꾸지 못한 채 볼 꼬집고 뒤통수 때리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다. 표준말로 했을 때보다 더 다양한 감정이 실린다. ‘너 사귀는 여자에게 그렇게 해? … 입이 찢어지도록 볼을 잡아당기고 머리 때리고 그랬어?’ 폭행 사건 조서의 한 대목 같지 않나. 입말과 글말의 일치를 희구하는 표준말은 증거 능력은 탁월하겠지만 에누리가 없다.

제목을 보고 이 드라마의 흥행 요인이 향수려니 했는데 아닌 것 같다. 지금보다 가난하고 억압받던 시절로 돌아가 그걸 지나온 나, 혹은 우리를 보고 대견해하는 것, 그렇게 과거와 화해하는 게 향수의 통상적인 소비 방식 아닌가. 드라마의 1990년대 중반은 핸드폰 대신 삐삐 쓰는 것 말고 모든 게 지금보다 여유 있어 보인다. 드라마 속 대학생들은 집에서 등록금과 하숙비를 받고, 스펙 쌓으려고 고생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20년 가까이 지나 모두 중산층 대열에 합류했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흥행에, 그때 20대였던 세대의 향수보다 지금 20대들의 동경이 더 작용하는 건 아닐까.

아무튼 드라마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사투리다. 경상도 사투리든, 전라도 사투리든 여차하면 욕이 섞인다. 하숙집 주인 남자는 딸을 부를 때 전라도 사투리 섞어가며 ‘야, 이년아!’라고 한다. 주인공 경상도 남자는 여자에게 ‘이 새꺄’라며 남자에게 쓰는 욕을 쓰기도 한다. 같은 욕이라도 표준말과 어울리면 모욕죄가 성립할 테지만, 이렇게 사투리와 섞였을 때 전해지는 건 애정 표현의 과잉, 혹은 절제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도 살갑게 다가온다.

사투리에 전복적인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대학 교련 시간에 교관이 최신 무기의 위력을 말하는데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한 경상도 학생이 물었다. ‘고 함 마으면 우찌 됩니꺼?’ 웃음이 터져나왔다. 질문은 분명히 야유의 역할을 했지만, 질문자가 그걸 의도했다는 증거가 없다. 그러니 화내면 화내는 이만 옹졸해 보일 뿐이다. 표준말에는 없는 사투리만의 능력이다. 지겹던 교관의 웅변은 이내 끝났다.

사투리와 관련된 우스개는 잘 잊혀지지 않는다. 경상도 남자가 전라도 여자와 미팅을 하는데 여자가 늦게 왔단다. ‘빠구리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경상도의 한 고등학교에 ‘안덕기’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수업시간에 떠들어서 선생님이 일으켜 세웠단다. ‘너 이름이 뭐야?’ ‘안득깁니더.’ ‘이 자식 봐라? 이름이 뭐냐고?’ ‘득깁니더.’ ‘그래, 듣기면 말해 봐. 이름이 뭐야?’ ‘안득깁니더.’ 어떤 악의나 음모도 없이, 순수한 소통의 의지만 가득함에도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지는 이런 우스개야말로 순도 높은 희극 아닌가.

<방언의 미학>(이상규 지음)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다. “방언은 억압받은 하나의 언어이며, 국어는 정치적으로 성공한 하나의 방언일 뿐이다.” 저자는 방언으로 국어의 곳간을 채우자고 말한다. 부산말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한 대담 기사에서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다. 부산의 표지판에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대신 ‘단디 보고 가이소’라고 써 보자고. 찬성한다. 미국 정치드라마 <웨스트윙>에서 대통령의 참모가 연설문 단어가 어렵다고 말하자 대통령이 쐐기를 박는다. “사전 찾아보라 그래.” 사전 찾아보는 부지런함 없이 어떻게 정치가, 문화가 발전하겠느냐는 말일 거다. 앞에 나온 사투리들을 모르겠다고? 그 말을 인용한다. ‘사전 찾아보라 그래!’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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