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런 답답한 시대에 옷은 무슨 옷인가 싶지만 헐벗고 다닐 순 없으니 쇼핑에 나선다. 요즘 한창 세일중인 값싼 에스피에이(SPA·제조유통 일괄 의류회사) 브랜드 앞에서 동공이 커지고 발길은 멈추는데, 이내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제3세계 노동자들을 위해서라도 싼 옷을 더 사주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불매운동에 동참하는 편이 나을까?
전지구적 경기침체 속에서도 ‘패스트패션’을 유행시킨 다국적 기업들은 호황을 누렸다. 이들의 ‘싼 옷 혁명’은 빈곤국 사람들의 희생 위에 가능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방글라데시에서만 의류공장 화재로 700여명이 숨졌고, 지난해 4월 의류공장 건물 붕괴로 사망자는 1135명에 달했다. 대부분 하청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다소 늦었지만 긍정적인 움직임도 보인다. 지난해 국제노동단체들은 방글라데시 하청공장 노동조건 개선 협약을 만들었고, 에이치앤엠(H&M)·캘빈클라인·베네통 등이 이에 서명했다. 그 나라의 옷 산업 관련 인구는 총 5000만명으로 추정되며, 외국 기업들이 빠져나간다면 더 큰 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다시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9일(현지시각) 방글라데시의 한국수출가공공단에서 5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수당 축소 소식에 반발해 시위를 일으켰고 진압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1명이 숨진 것이다. 한국 업체 쪽은 현지 노동자들이 조정된 임금체계를 오해했으며, 경찰의 발포로 사고가 일어났다고 밝혔다. 불량배들의 약탈 때문에 기업의 피해도 크다고 한다.
사실 한국은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의 ‘큰손’이다. 지난해 3월 코트라의 자료를 보면, 2011년 말 기준 우리나라는 방글라데시 섬유 및 의류 제조업의 최대 투자국이며 관련 부문 투자 비율은 우리나라 총 투자의 52%에 이른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공장 노동자들의 처우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어떤 조처를 취하고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정치학자 아이리스 영은 정치적 책임에 대해 ‘정의를 위해 공유된 책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다수가 구조적 부정의에 눈감는 건 불공정한 과정이 은폐되고 나와 타인의 연결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 플러스 원’에 서려 있는 약자의 눈물을 아는 사람은 그 물건을 구매하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의 값싼 노동을 떠올린다면 에스피에이 브랜드 세일에 환호할 수만은 없다.
물론 특권층은 이른바 ‘명품’ 가운데서도 윤리적 생산을 강조하는 물건을 사면서 정치적 견해를 쉽게 드러낼 수 있다. 반면 저소득층은 노동의 대가를 공정하게 지급하는 상품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더 적다. 공정무역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더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사람들은 정부나 조직에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질 수 있다.
국가 자산의 민영화나 복지 축소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영의 주장대로, 국가가 손쉽게 파괴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문제를 풀기 바란다면 국민은 공공성을 위한 비용을 더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나아가 부자가 가난한 사람한테 돈을 받아 대대손손 부를 누리는 게 제대로 된 세상인지, 소시민으로서 남들 다 하는 대로 하고 사는 내 행동이 부정의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데 얼마나 기여해 왔는지 폭넓게 고민하며 때로는 이익을 포기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내가 지갑을 여는 일부터, 사회적으로 불공정한 일이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까지 모든 일상에 ‘나’의 정치적 책임이 있다. 무겁지만 각자의 삶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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