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이미지 정치,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방식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내용은 모호한데 포장은 그럴듯하다. 창조경제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부 관료들도 모르는데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그 말을 외친다. 실천은 없이 역행하는데 변명은 청산유수다.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들은 모조리 퇴행 중인데 퇴행이 아니라는 강변만이 되돌아온다. 본질은 사라지고 선정성만 난무한다. 외국어 연설, “통일은 대박” 따위의 선정적 이미지들이 민생이라는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이젠 정부에 대한 모든 비판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기로 작정했는지 ‘비정상의 정상화’를 기조로 내세웠다.
과학 내부의 혁명을 논할 뿐이지만,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정부의 무지함에 경종을 울리는 함의를 담고 있다. <구조>에는 ‘비정상과학’이라는 단어가 5번 등장한다. “하나의 변칙현상이 정상과학의 또 다른 퍼즐 이상의 것으로 보이게 될 때, 위기로 그리고 비정상과학으로의 이행이 시작”되며, 그때에 이르면 과학자들은 “변칙현상을 그 자체로서 점점 일반적으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쿤에게 과학혁명은 정상과학 상태에선 일어날 수 없다. 정상과학 상태에서 과학자들은 퍼즐 풀이에만 몰두한다. 과학에서의 진보는 변칙현상들이 누적되고 과학자들이 더 이상 그 퍼즐들을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여길 때, 비정상과학의 상태를 거쳐 일어난다.
따라서 쿤의 <구조>에서 비정상과학은 정상과학이 아닌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쿤이 보기에 과학 이론의 진화는 그 자체로 이미 비정상성을 함축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상태가 불가능하다면, 과학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정상과학 상태만 지속된다면 진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쿤은 정상(normal) 과학에 반대되는 개념인 비정상(abnormal)이라는 용어 대신, 비정상(extraordinary)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우리말의 비정상처럼 부정적 어휘가 아니라 ‘비범한’을 뜻하는 긍정적 어휘다. 오히려 ‘초(超)정상’이라는 번역어가 어울린다. 초정상은 정상으로 가기 위한 잠정적 비정상 상태다.
초정상 상태는 비정상적인 사회의 혁신을 이끌어왔다. 민중의 초정상적 상태를 비정상으로 규정짓는 자들은 언제나 당대의 기득권층이었다. 4·19 혁명, 광주민주화항쟁, 1987년 6월 항쟁, 2008년 촛불집회, 권력은 이 모든 초정상적인 민중의 외침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규정하고 탄압했었다. 반면, 3·15 부정선거, 군부의 시민학살, 박종철 고문 사건과 같은 비정상 상태들은 권력에 의해 정상으로 규정되었다. 역사의 교훈은 분명하다. 권력이 말하는 비정상 상태는 언제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을 직시한 민중의 초정상 상태였다.
변칙현상들이 더 이상 퍼즐로 보이지 않을 때 패러다임의 위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 기존의 패러다임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패퇴시킨다. 이 과정을 쿤은 종교적 개종으로 표현했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변칙현상이라고 간과해온 문제들이 이제 시민들에 의해 퍼즐 풀이 이상의 본질적 긴장 관계로 인식되고 있다. 보편적 복지, 무상급식, 경제민주화, 모두 초정상의 증상들이었고,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도 대선을 앞두고 그 필요성에 굴복했었다. 국민은 ‘민영화’라는 현상이 더 이상 예외적인 변칙현상이 아님을 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박근혜 대통령도 공약했던 경제민주화의 길이다. 과학이 진보하려면 혁명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혁명은 비정상과학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쿤에 따르면 “혁명은 대립되는 두 진영의 어느 한쪽이 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종식된다.” 이제 누군가는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비정상이 정상화되는 방식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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