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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자기계발과 오리발 / 김홍민

등록 2014-01-15 19:12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수영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순간이 있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쌓이면서 몸에 이상을 느꼈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목이 뻣뻣하게 굳어서 돌아가지 않는 거다. 운동이 필요하다는 처방을 받았다. 마침 회사 근처에 수영장이 있어서 그날로 등록했다. 마포구청에서 운영하는 시설로 25미터짜리 레인이 다섯개 있는 아담한 풀장이다. 여기서 출근하기 전에 1시간가량 강습을 받는다. 해가 바뀌었으니 햇수로 4년째, 거의 빠지지 않고 다니고 있다. 비용을 지불하고 배우는 데서 나는 꽤 성실한 편이다. 그 결과, 같은 시간대를 통틀어 내가 제일 빠르다. 자랑스럽다. 바로 옆 월드컵 경기장에 더 좋은 시설을 갖춘 수영장이 있어서 이곳은 비교적 한산한 편인데 이 점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지난 4년을 돌아보면 붐볐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박태환 선수가 이런저런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다음달 등록자가 상당히 늘었다. 그리고 요맘때, 새해 첫달에 수강생이 는다. 해가 바뀌면 새로운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리라.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수용시설이 일정한데 수강생이 늘면 다 같이 불편해진다. 수영의 경우는 뒤에 있는 사람이 앞사람을 따라가는 일렬종대 구조라서 중간에 사람이 많아지면 제대로 운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주최 쪽에서는 가만히 있을까. 적당히 조정해 주면 모두가 즐겁게 운동할 수 있을 텐데.

이곳에서 겨울을 세 번쯤 보내고 나서야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초에 등록하는 사람들은 월말이 되면 소리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수영장 쪽에서 무리하게 막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수강료는 낼 테고 자연스럽게 줄어드니까.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오리발 강습을 하는데 주인 잃은 오리발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의지란 이토록 박약한 것인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다.

서점에서는 이 시기에 자기계발서가 많이 팔린다고 들었다. 수영장이 붐비는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겠다. 나는 책이란 읽어두면 무엇이든 도움이 되지 손해 볼 건 없다고 여기는 인간이므로 자기계발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뒷말을 하고 싶진 않다. 책을 팔아 먹고사는 처지에서야 읽지 않는 것이 서운하지 읽는 게 무슨 문제겠나. 그렇다고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강행되며 새롭게 반복된 자기계발의 순환이 한국에서도 압축적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식의 어려운 표현을 쓸 마음도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있다. 모든 책은 기본적으로 자기계발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흔히들 심심풀이 땅콩처럼 생각하는 장르소설만 해도 그렇다. 예컨대 인류의 생존을 책임진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과학소설 <엔더의 게임>은 훌륭한 리더십 교재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실체를 미스터리 소설로 승화시킨 <이유>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못지않은 멘토링 서적이다. 생떼를 부리려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해가 바뀌었으니까, 혹은 박태환 선수 같은 유명인이 읽었으니까, 그렇게 사뒀다가 마지막 장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주인 잃은 오리발 신세로 전락한 자기계발서들을 책장에 잔뜩 쌓아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짐작한다. 이왕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좀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그렇다면 이것저것 구입해서 읽어보는 수밖에. 정작은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인문서, 철학서, 사회과학서, 그리고 나처럼 장르문학이나 만드는 사람도, 다 같이 좀 먹고살자.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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