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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한-미동맹 해치는 모독적 회고록 / 송민순

등록 2014-01-20 19:13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독자들은 먼 역사보다는 자기 시대의 이야기에 가장 관심이 많다. 그런 관심을 겨냥하여 저명인사들이 회고록이란 이름으로 유사 역사를 써낸다. 그러나 당대의 일에 대한 개인의 회고가 하나의 역사로 확립되기는 어렵다. 그 시대의 정치적 환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반세기쯤은 지나 관련 문서들이 공개되고 객관적 시각으로 돌이켜볼 여유가 생길 때, 사건들은 비로소 ‘역사’로 기록되는 것이다. 영국 역사학자 존 볼의 견해다.

그럼에도 속 깊게 쓴 회고록은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가보다는 돌이켜보니 더 잘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는 것을 비춰주는 특유의 가치가 있다. 현직 정책 입안자들이나 후학들에게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전까지 미국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게이츠의 회고록이 미국에서는 자신이 재직한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자극적 묘사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전 유사한 회고록을 출간한 또다른 전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의 회고록은 ‘국방장관’(Secretary of Defense)이 아니라 ‘자기방어장관’(Secretary of Self-Defense)의 변이라는 혹독한 평을 받았다. 게이츠의 회고록이 어떤 비평을 받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공통점은 두 사람의 국방장관 재직 기간이 미국 대외정책의 군사화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미국이 겪고 있는 대내외적 곤란은 천문학적 재정 적자와 일시적 정부 폐쇄, 악화일로에 있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실패가 잘 보여 주고 있다.

게이츠는 노무현 대통령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안보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말했다 하면서 그가 “반미적이고 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이 면담에 배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문제의 주제에 대해 외국인사 면담 때 수차례 언급한 맥락을 기억하고 있다. “북한이 하는 짓들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캐보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접근 없이 압박만 해서는 풀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까지 옥죄는 결과를 가져온다. 미국이 이런 한국의 고민을 이해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를 증진시키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면 좋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이런 화두로 시작해서 노 대통령 특유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는 날이면 대화가 산뜻하게 마무리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필경 게이츠 접견 때도 유사한 분위기로 짐작된다. 그러나 최소한 필자의 기억으로는 공식 석상은 물론이고 사석에서도 “미국이 아시아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이라는 의미로 발언하는 것을 들은 적은 없다.

문제의 2007년 11월 게이츠 면담은 남북정상회담 한 달 후에 있었다. 당시는 한국 정부가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사전 협의 없이 남북회담에 매달리고 있다고 보던 시절이었다. 노 대통령에 대한 선입관이나 당시 남북관계로 어색했던 한-미 관계의 기류에 비추어 게이츠가 통역을 통한 대통령의 긴 설명을 듣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을 소지가 있다.

게이츠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강인하고 현실적이며 아주 친미적이었다고 묘사했다. 충분히 가능한 평가이다. 노 대통령이나 이 대통령은 물론 모든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익에 입각해서 국정을 편다. 다만 각자의 세계관과 철학에 입각한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국이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면 좋은 한국 지도자이고 따지면서 고개 바로 들면 불유쾌하다 못해 제정신 아닌 사람으로까지 몰아가고 있다. 아무리 전직이라도 동맹국 국방장관이 동맹 파트너의 전직 대통령을 겨냥해 인격살인을 해서야 되겠는가.

2007년 11월7일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이 실제로 뭐라고 했기에 동맹국 전직 장관으로부터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하는지 당시 배석한 인사들이 지금 밝혀 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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