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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목숨을 건 추락 / 이재성

등록 2014-01-26 19:32수정 2014-01-26 22:19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발레 스타 출신의 한 무용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안무가가 나오기 힘든 이유에 대해 서로 맞장구를 치며 의기투합했던 적이 있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만이 진리인 것처럼 따르기를 강요하는 교수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인 현실에서 독창적인 안무가가 나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마사 그레이엄이 아무리 탁월한 안무가라 할지라도 20세기 초반 미국에서의 일일진대, 그것을 교과서처럼 외우고 반복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나라 무용계에 훌륭한 테크니션은 많지만 자신만의 색깔과 철학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예술가는 드문 까닭이다.

뜬금없이 무용계 얘기를 꺼낸 것은 ‘창조경제’를 강조한 박근혜 대통령의 영어 연설을 보며 답답한 생각이 들어서다. 국내에서 창조경제는 이미 국민적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실질적인 내용만 뒷받침된다면 산업화 시대의 낡은 틀을 벗어던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만, 과거 지향적인 박근혜 정부의 한계로 인해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교육을 보자. 앞서 예로 든 무용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입시 위주로 획일화한 우리 교육 전반이 스스로 생각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기르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해결책 또한 모두 알고 있다. 문제 풀이에 능한 명문대 출신들이 ‘패스트 팔로어’ 시대의 주역이었다면, 이제 스스로 문제를 제시할 줄 아는 창의적인 인재들이 ‘퍼스트 무버’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는데도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 강력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을 때 발생한다. 이들은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의 싹조차 밟아버린다. 혁신학교 같은 유의미한 실험을 방해하려 애쓰는 문용린 서울시 교육감, 국정 교과서 부활을 주장하는 새누리당이 그런 부류다.

산업구조 역시 창조와는 거리가 멀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하청노동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현실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공룡이 된 재벌기업은 우리 경제의 모세혈관까지 거의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 답도 없는 창업이나 창작을 꿈꾸지 말고 좋은 대학 나와 삼성에 취직하는 게 안전한 인생을 보장한다는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이 선진국으로의 ‘목숨을 건 도약’에 성공하느냐는 도처에 깔린 앙시앵 레짐과의 결별 여부에 달려 있다. 대선 직전, 경제민주화 욕구가 분출한 것도 우리 경제의 내용과 형식 사이에 발생한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자발적 운동이었다. 비대한 재벌 위주의 경제 구조가 2만달러 시대의 분출하는 개성에 더는 맞지 않게 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런 시대정신을 공약으로 선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경제민주화의 ㄱ자도 꺼내지 않고 있다. 대신 재벌기업들에 투자를 구걸하는 구태를 반복하고 있다. 규제 철폐와 민영화라는, 이미 파산선고를 받은 신자유주의 정책수단도 전가의 보도처럼 다시 꺼내들었다. 그러나 이는 얼음의자 위에 앉아서 춥다고 열풍기를 트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다.

위대한 안무가 피나 바우슈는 연극 문법을 무용에 차용해 ‘탄츠테아터’(댄스시어터)라는 새 장르를 개척했다. 덕분에 현대 무용의 중심지는 마사 그레이엄의 미국에서 피나 바우슈의 독일로 옮겨졌다. 마사 그레이엄 복제판이 넘쳤던 미국은 적어도 현대무용에선 게토가 됐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마사 그레이엄의 후예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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