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4일 그리스 아테네시 한복판에서는 은퇴한 77살의 약사가 권총으로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구하는 비참한 상황이 되기 전에 나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이 길을 택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35년 동안이나 연금을 부은 그리스의 중산층 노인은, 호구지책마저 막막할 만큼 경제 사정이 나빠진 이유를 죽음으로 물었다.
2014년 2월 세계 각지에서 2년여 전 그리스의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메아리 없는 물음이 울려 퍼질 듯하다. 아르헨티나, 터키,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네시아 등 이른바 신흥경제권의 금융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 나라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경제적 애로는 자국 통화가치의 폭락과 물가 급등이다. 그리스와 달리 최근의 신흥국 금융 불안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닥친 ‘돌풍’(서든 스톰)이 원인이다. 성장률, 경상수지, 고용, 재정건전성 등 실물경제의 기초여건으로 보면 대부분 신흥국들이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낫다.
신흥국 금융 불안의 파급 경로는 명확하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출구전략(양적완화 축소)에 나서자 신흥국에선 외화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금융 불안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연준은 출구전략의 명분을 미국 경기의 회복에서 찾는다. 경기가 침체 국면을 마무리하고 회복되는 단계인 만큼 그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펼쳤던 신용팽창 정책을 서서히 거둬들인다는 것이다.
출구전략의 배경을 다른 데서 찾는 전문가들도 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재무차관을 지낸 폴 크레이그 로버츠는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미국 실물경제는 실제로 회복되지도 않았으며 출구전략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신흥국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달러 가치 안정을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신흥국들이 제물로 바쳐질까.
박순빈 논설위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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